인간관계란 어떤 것입니까?

시절인연에 대하여

by 페트라


“너는 내 가족 같은 친구야.”



한때 피의 맹세처럼 되새겼던 다짐이 우습게 들릴 정도로 단숨에 끝났습니다. 25년의 세월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가네요. 누군가는 그 세월이 허무하고 허탈하지 않냐고 물어볼 수 있겠지만, 오히려 저는 지금 후련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오늘 자매라고 생각했던 25년 된 친우와 절연했습니다. 다시는 보지 않을 생각입니다. 오늘은 시절인연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시절인연이란 불교 용어로, 인과 연이 다하면 거부해도 자연스럽게 만나질 것이고, 또는 헤어질 것이라는 인연에 대한 개념입니다. 운명과도 비슷하지요. 전생의 업보와도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꽤 많은 잘못을 저질렀나 봅니다. 이 정도면 나라를 팔아 먹은 이완용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요.


그 긴 세월 동안 갈등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고, 서로 양보하면서 화해했습니다. 빠른 시간 내에 갈등을 해결하기에 집중했고, 서로 관계를 원상 복구시키는 데에 급급했던 것 같습니다. 정작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는데 말이죠.




나이가 들수록 친구가 적어지고 인간관계가 좁아진다고 하죠. 정말 그렇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맺고 끊는 것을 못하는 그 친구를 보면서 왜 저러고 살까 한심해하면서도, 친구이니까 오죽하면 힘들어서 그러겠거니 하고 아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친구는 저를 귀찮아하더군요. 당연하다는 듯이 저와 하는 약속들은 파투 내는 것은 물론, 파투내면서 잦은 핑계와 짜증, 게다가 나중에는 잠수까지 타더군요. 오죽하면 여행 계획까지 파투를 낼 정도였으니까요. 전 여기서 슬슬 지쳐갔고, 지적을 해도 바뀌지 않는 행동과 태도에 정이 떨어져 갔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쯤이었을까요. 이 친구는 제가 가족상을 당했는데도 오질 않더군요. 심지어 외할아버지 상도 오질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탓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점점 그게 당연한 줄 일더군요. 사실 이 친구가 작년 첫 째 오빠의 장례식장에도 오지 않았길래 제 마음에서 정리하는 중이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 그 친구의 집에서 받은 기억이 좋아 명절에 종종 선물을 드리곤 했습니다. 그러다 제가 2년 전부터 여러 가지 안 좋은 상황 때문에 백수로 지내게 되었고, 당연히 명절 선물은 끊기게 되었죠. 바라지도 않았건만, 뻔히 다 알면서 먼저 보내겠다고 말도 꺼내지 않는 그 친구를 보며 ‘쟤는 받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제가 본인에게 잘못한 기억 때문에 피해 의식으로 당연히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글쎄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제 잘못이고, 어디까지가 본인 잘못인지 스스로 돌아보기는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걸 귀찮아하는 그 친구가 과연 스스로 무언가를 자주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최근 들어, 그 친구의 새로운 남자친구 사건이 트리거가 되어 연을 끊게 됐습니다. 자세한 내막은 사생활이라 공개하기가 어렵지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친구가 남들에게 저를 소개하거나 대하는 태도를 볼 때, 제가 굉장히 연약하다고 생각을 하더군요. 관점을 바꾸면, 저를 잘 안다고 얕잡아 본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가장 힘들 때의 모습을 여러 번 보니 제가 참 우스웠겠지요. 안 그래도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그 친구가 제가 그렇게 되니 얼마나 재미있어했을지 상상이 가네요. 그 밑바닥을 보고 나니 저는 그 친구가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짐승으로 보입디다.


그 시커먼 속내를 감출 기미도 보이지도 않은 채, 저를 순진하다며 눈 가리고 장님 노릇만 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했죠. 시련은 사람을 강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짐승에겐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고 교훈이 없습니다. 절연을 했더니 이렇게 마음이 시원합니다.




시절인연이라는 게 업으로 인해 다시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이 친구와 저는 악연이 아닐까 싶어요. 가장 가까이서 약점을 파고드는 적이라면 기꺼이 교훈을 맞이하겠습니다. 제 혈육도 떠나보냈는데, 이까짓 남의 새끼 하나 못 내보내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저를 정말 큰 그릇으로 만드시고 쓰려고 하시나 봐요.

그런데 이번엔 정화라서 아프진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합니다.

긴 시간 고통받던 제게 한줄기 빛을 내려주셨어요.

부디 그 어린 양에게 자신을 돌아볼 은혜를 주소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진정으로 깨닫게 하소서.

아멘.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