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35.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게 뭔가요? 영어요
"책이요."
"18,800원이요."
"근데요. 이 책 읽으면 도움이 될까요?"
이게 무슨 색다른 시비인가 싶어서 손님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아, 다른 뜻은 없고요. 저한테 딱 필요한 책인데 진짜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서요. 사장님은 읽어보시고 판매를 하시는 거 같아서 두서 없이 물어봤어요."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안경 속에 주저하는 눈빛을 숨기며, 움츠려든 어깨가 더 움츠려들어서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녀는 왜 이곳에서 한껏 위축된 상태로 책을 골랐을까?
"학생?"
"네."
"왜 이 책이 절실한 거예요?"
"아, 제가 대학생인데요. 저 정말 영어를 싫어하거든. 그래서 영어를 피해서 국문과를 갔는데요. 필수 교양도 영어고 토익 시험도 봐야 해요. 영어 공부때문에 진짜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요. 근데 이 책에 영어를 잘 할 수 있는 노하우가 있을까 해서요."
코쓱.
대학교 개학 시즌 3월이 되었구나.
대학생 손님의 말을 들으니,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 역시도 영어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했다. 해외 여행을 가지 않을 건데 왜 영어를 배워야 하는가가 풀지 못한 나만의 숙제 중 하나였다. 고등학교는 의무교육이라 어쩔 수 없이 영어를 배워야했지만, 대학교 때는 원하는 수업을 골라 듣는 재미가 있지 않은가? 그렇게 대학교때부터 철저하게 영어와의 인연은 끊고 싶었다.
그.랬.는.데.
필수교양 수업이 영어였다. 게다가 원어민 교수가 직접 가르쳐서, 그 수업은 대부분 영어로 진행됐다.
나는 세상에서 영어를 제일 싫어했다. 그런데 학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었었는데... 수업 시간 내내 영어만을 사용한다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내 목소리의 데시벨이 남들에 비해 월등히 높았기에 내 나름대로 속닥거렸는데, 그때마다 원어민 교수에게 걸렸다.
"한국말 하지마."
하도 나만 보면 한국말 하지 말라고 해서 원어민 교수가 나만 주시하는 것 같아 불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점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참으며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시험에서 원어민 교수를 혼쭐 내주겠다며 열심히 공부를 했다.
시험은 괜찮게 봤다. 범생인 친구와 답안지 비교를 했는데 많이 틀리지 않았다. 학점에 대해서 내심 기대했는데... 이런! 나보다 시험 못 본 친구가 나보다 좋은 학점을 받은 것이다.
나도 원어민 교수를 싫어했었는데 원어민 교수도 나를 애지간히 싫어했는가보다.
그래서 학점에 대해서 항의를 하러 교수실을 당당히 찾았다.
문 앞에 섰다.
... 음... 항의를... 영어로 해야 하는데... 나는 영어를 못하잖아? 소통이 안되는 상태에서 항의를 하면 학점이 수정될 수 있을까?
결국 나는 문을 열지 못했다.
대신, 문 옆에 걸려 있는 작은 칠판에 영어로 한 문장을 썼다.
한 문장을 썼을 뿐인데 상당히 내가 뭐가 된 것 같고 어깨가 으쓱해졌다. 뭔가 시원하게 복수를 한 것같은 느낌적 느낌이랄까?
칠판에 적은 문장은...
I HATE YOU
였다.
'하... 나도 영어를 극혐했던 때가 있었지... 물론 지금까지도 친해지지는 않았지만.'
이 아이는 앞으로 움츠러들날이 많은데 벌써부터 움츠러들어 있다니, 그 어깨를 시원하게 펴주고 싶었다.
"이 책은 언어의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어 줄 수는 있을 거예요. 그런데 낚시하는 방법은 알려주지만 생선을 낚아주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큰 기대치를 안고 읽지 말고 스트레스를 날려버린다는 마음으로 읽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음...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것 같은 표지기는 하네요."
"그쵸~ 반전이 많은 책이랍니다."
"카드 여기요!"
"네. 결제할게요~ 저도 영어 겁나 싫어했거든요. 지금도 싫어하고요. 근데 요즘 같은 시대에 영어 공부가 절실하다고 느끼고 있어요~ 그래서 저도 이 책을 읽었답니다. 읽어보니... 열심히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을 햇씁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많이 파세요!"
그렇게 손님은 산 책을 소중하게 들고 서점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