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버린 시험지

니 마음은 오죽하겠니.

by 심행일치


오래전 일이다. 학년이 끝나갈 즈음 학부모님께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보람이 성적이 어느 정도 되나요? 저는 아이가 성적을 알려준 적이 없어서 잘 몰라요.”


“네?? 어머님, 항상 우편으로 성적표를 발송하고 문자로도 성적표 발송을 알려 드렸는데요?”


“아 그래요? 어쩐지 이상하더라. 성적표 안 오냐고 물으면 자기 반은 성적표를 우편으로 안 보낸다는 거예요. 모르겠다고 그러기도 하고.”


“학부모님 확인 사인이랑 코멘트 회신도 하는데, 보람이가 안 가져온 적은 없어요.”


“흐흐흐 그래요? 공부가 꼴찌라 성적표를 숨겼나 보네요.”


“어머, 보람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리고 보람이가 교우 관계도 좋고 학교생활 즐겁게 하고 있어요. 친구를 잘 도와주는 기특한 아이랍니다.”


“선생님이 잘 봐주셔서 그런 거예요. 집에서는 공부하라면 싫어하고 막내라 그런지 자기 맘대로예요.”


“흐흐 어머님, 보람이 성적이 궁금하시니까 제가 1년 치 성적 한꺼번에 다시 보내 드릴게요. 그리고 지금 궁금하실 테니 당장 성적 불러 드릴게요.”



며칠 후 보람이 어머님은, 아이의 방 서랍에서 성적표 일 년 치를 찾았고,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셨다고 알려주셨다. 그 후 보람이는 성적표를 숨기고 사인을 위조한 죄로 남은 기간 내게 놀림감이 되긴 했다. 그냥 보람이도 엄마도 즐겁게 웃고 넘긴 에피소드였다. 그리고 일 년 동안이나 아이의 성적표를 하염없이 기다린 보람이 어머님의 그 느긋함이 인상 깊기도 했다. 하긴 보람이도 무사태평 느긋해서 귀여운 아이기도 했다.

오래전이라 가능했던 추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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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이 된 우리 큰애의 성적표는 2년간 내가 직접 보기도 하고 보지 못하기도 했다.

그래도 고교교사 엄마니 성적표에 무감할 수는 없어서 정기 고사 후 성적표가 나올 때쯤이면 넌지시 성적표 받아 왔느냐고 묻기도 했다. 처음에는 ‘엄마 너무 충격받지 마시라’며 착실히 성적표를 내밀던 큰애가 갈수록 점점 어물쩍거렸다. 어떤 때는 성적표를 보여 줄 수 없다며 숨겨 놓고 안 보여 주기도 했다. 어이도 없고 실망도 되지만 이럴 땐 작전상 후퇴다. 나도 오래전 보람이 어머니의 느긋함을 흉내 내며 짐짓 대범한 척한다.


언젠가 뭘 찾느라고 서랍을 열었더니 찢어진 시험지가 나오기도 했다. 그걸 보니 나도 화가 났다.

'뭐야~ 이럴 거면 열심히 했어야지. 지가 안 해놓고 왜 이래?'

점수가 그럴 만도 해, 제 딴에는 속상하고 화나는 마음에 시험 점수를 부정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속상한 마음을 교실에서도 종종 본다. 찢긴 시험지, 채점하던 사인펜으로 시험지에 그냥 마구 낙서해 버리고 꾸깃꾸깃 구겨버린 시험지를 본다.



염려되기에 그러지 말라고, 화난다고 그럴 게 아니고 왜 맘에 안 드는 점수를 받게 되었는지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실수를 보완하라는 당부와 나무람을 곁들인다. 애들의 속상한 마음에는 가닿지 않을, 어림도 없는 말이다. 시험지를 구겨서 버리고, 찢어버리는 건 더 잘하고 싶었던 아이의 마음이다.

솔직히 시험 점수가 안 좋은 건, 선생님이 어렵게 내서가 아닌가?^^



그런데, 고교 내신이라는 건 그렇다. 일희일비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석차 등급을 가려야 하는 입장에선 1학기 첫 시험인 중간고사 때 테스트하듯 어렵게 출제하고, 바로 이은 기말고사 때 아이들의 수준에 맞춰서 석차 등급이 세팅되도록 난이도를 조절한다. 한 시험이 어려우면 한 시험은 상대적으로 좀 낫다.



또, 상대 평가란 것의 함정도 있다. 지금 내 점수가 78점 이어서 세상 망한 것처럼 절망적이어도, 그 시험의 난도가 높아서 상대적으로 내가 잘 본 시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능 시험장에 들어가는 고3 아이들한테 항상 당부하는 말이 그것이었다.

‘내가 어려우면 다른 이들한테도 다 어려워. 그러니 절망해서 남은 시험 망치지 말고 끝까지 최선 다해 마치고나 와.’

흔들리지 않는 멘탈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참 어렵다는 게 문제다.



아이의 성적표가 차근히 다 모여 있지 않아도 요즘 세상에 문제 될 것도 없다.

학교 행정실에 생기부 자료를 요청할 수도 있고, 담임 선생님께 부탁드려 성적자료 일체를 다시 받을 수도 있다.

그 당시 들끓는 마음으로 성적표를 감추고, 시험지를 찢어버린 그 마음을 알아주는 수 밖에. 화 나고 실망스러워도 꾹 참고 나도 열심히 노력한다.



실전에 나서는 건 아이들이고, 엄마는 아무리 많은 전략을 갖추고 있어도 결국은 아이의 마음 돌보는 것만이 가장 적절한 전략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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