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고3 아이의 개학 D-1
새롭게 세운 엄마의 수칙
저녁 식사 자리, 숟가락을 내려놓던 큰아이가 묵직한 한숨을 내뱉는다.
무심한 동생이 웬일로 "언니 왜 그래?"라고 묻자, 돌아오는 대답은 짧고도 날카롭다.
"니도 고3 돼봐라.“
그 한마디에 아이의 표정을 살폈다. 겨울방학 내내 잠 독에 빠져 지내던 아이였다. '고3인 걸 알긴 아나' 싶어 속이 터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 한숨 속에 담긴 무게를 보니 비로소 실감이 난다. 아, 너도 무거웠구나. 방학 내내 심한 늦잠을 자버릇해서 내 속을 무던히도 답답하게 하더니 어쩌면 방학 내내 쏟아지던 그 잠은 게으름이 아니라, 다가올 현실을 피하고 싶었던 아이만의 도피처였을지도 모르겠다.
미안함과 다행스러움 사이
사실 아이가 잠만 잔 것은 아니었다. 간헐적이지만 운동도 했고, 미술 학원 특강을 위해 주 4일을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국어와 영어 특강을 듣고 가끔은 사회 영역 책장을 넘기던 뒷모습도 기억한다. 미대 입시생이라 수학에 대한 부담이 덜한 것이 천만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아이의 노력을 보기보다 '부족함'을 먼저 찾아내곤 했다. "무슨 공부 하니?"라는 내 질문에 아이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지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이만큼도 안 하면 입시생이 아니라는 무언의 압박, 네가 늦잠 자는 걸 엄마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알아달라는 생색. 응원의 탈을 쓰고 건넨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라’는 주문이 아이에겐 도리어 버거운 숙제였을 것이다.
20년 차 교사도 떨리는 3월의 박동
내일이면 개학이다. 20년 넘게 학교에 몸담아왔지만, 올해의 개학 전야는 유독 심장이 벌렁거린다. 맡은 업무와 수업 준비를 하느라 며칠간 집이 엉망이 된 터라 밀린 빨래와 설거지를 해치우며 마음을 다스려보지만, 강렬해지는 심박 수는 숨길 수가 없다.
이 떨림은 과연 무엇일까? 드디어 '잠자는 방 속의 고3'을 학교로 보낸다는 해방감일까? 따져보면 이건 어마무시한 손해다. 내 아이 둘을 학교로 보내고 나면, 나는 다시 210명의 아이를 마주해야 한다. 엄마는 내가 임용고시를 볼 무렵, 집으로 까불며 몰려드는 학생들 꿈을 꾸셨다는데, 나는 매년 그 예지몽 같은 현실을 산다.
그래도 은근히 3월을 기다려왔다. 겨울잠 자는 곰 같던 아이를 깨우기 위해선 엄마의 잔소리보다 학교라는 시스템의 동력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지난 두 달, 내 마음은 요동을 쳤다. 화를 내다, 분통이 터져 집 밖을 뛰쳐나갔다, 인공지능 제미나이와 대화하며 불안을 다스리다, 결국 '내려놓음'에 도달했다. 자식은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주려 하늘이 보낸 선물이라더니, 정말 영락없었다.
입은 닫고, 눈은 반만 뜨고
이제 본격적인 고3 엄마의 시간이 시작된다. 아이의 닫힌 방문 너머를 궁금해하기보다, 내 일에 더 집중하기로 결심한다. 내가 올해 만날 210명의 아이와 부대끼다 보면 이 1년도 금방 지나갈 것이다.
엄마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것 밖에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아이도 내 눈치를 보고 나도 아이의 눈치를 보는 숨막히는 상황을 더는 하지 말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아이가 지칠 때 찐하게 한 번 껴안아 주는 것, 맛있는 밥을 차려주고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임을 마음에 새긴다.
올해의 수험생 엄마 수칙:
입은 꾹 닫고, 아이와 눈이 마주치면 무조건 밝게 웃기.
따뜻한 밥 한 끼 정성껏 챙기기.
아이가 하는 저 나름의 최선을 긍정하기
눈 반만 뜨고 보기.
바야흐로 봄이다. 요 며칠 기온이 제법 봄 흉내를 낸다. 느긋하게 봄을 맞이하려 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심장은 여전히 요동치지만, 이 박동은 아마도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설렘이라 믿고 싶다.
입시 준비로 분주할 딸, 그리고 고3, 고1 교실에서 만날 210명 학생들. 그리고 개학을 맞아 벌렁대는 심장의 나.
개학을 앞둔 오늘 밤. 다들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학인 내일부터 우리는 또 번듯하게 각자의 역할을 잘 해낼 것이다.
우리, 올 한 해 1년을 잘 살아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