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잠식한 고딩이들
큰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자, 나의 세상은 안팎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낮에는 교실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을 만난다. 칠판 앞에 서서 보면 아이들이 쓰고 있는 ‘사회적 가면’이 보인다. 졸려도 참아야 하고, 싫어도 웃어야 하며, 귀찮아도 펜을 잡아야 하는 열일곱, 열여덟의 고단한 연기. 아이들은 학교라는 무대 위에서 저마다의 에너지를 소진하며 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문제는 퇴근 후였다. 현관문을 열면 학교에서 에너지를 탈탈 털어 쓰고 돌아온, 가면을 벗어 던진 진짜 ‘고등학생’이 제 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학교에서 내내 지쳐있는 아이들을 보고, 집에서도 그 이면의 적나라한 피로를 마주하는 삶. 나는 큰아이가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행복하다 말하지 못했다. 학교와 집, 그 어느 곳에서도 숨 쉴 틈 없이 밀려오는 K-고딩의 고단함이 내 일상을 잠식했기 때문이다. 동료들에게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나야 나. 하나도 안 즐거워!
K-고딩이 학교에도 득실거리고 심지어 집에도 있어!
온종일 K-고딩과 같이 산다고!”
주변 동료 선생님들께도 물었다. 고등학생 자녀를 키우며 행복하시냐고(행복하셨냐고).
아이의 성적과 상관없이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아니, 그때가 내 인생에서 제일 힘들었지.”
"빨리 지나만 가라 했어."
왜 우리는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며 행복하지 못할까. 의구심은 곧 개탄으로 변했다. 입시라는 거대한 괴물만 떼어낸다면, 학교는 아이들이 마음껏 배우고 성장하는 터전이 될 수 있을 텐데. 분노의 화살은 학교로, 때로는 이 나라의 교육 현실로 향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아니, 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으니 더더욱.
힘없이 비실거리는 아이에게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게 해서 미안하다”거나, “엄마가 미국인이 아니라 미안하다(미국인이면 적어도 영어는 거저 잘 했을 거 아니냐~)”는 싱겁지만 얼마간의 진심이 담긴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2002년 발령 이후 20년 넘게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근무했다. 서울이 아니더라도 지방 대도시의 소위 말하는 ‘학군지’는 역시 매우 치열한 경쟁 속에 있다. 그 속에서 내가 쌓아온 경험치는 커져갔지만, 그 데이터가 쌓일수록 내 안의 공포도 커졌다.
미혼 시절, 살벌한 분위기의 학군지 중심에 있는 학교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수업 시간 1분의 농담조차 ‘시간 낭비’라며 눈총을 주던 아이들. 여유라곤 실종된 그 살풍경한 모습을 보며 나는 자신이 없었다.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아 잘 키울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아졌다. 이 폭력적인 경쟁 사회에 내 아이를 밀어 넣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든든한 비빌 언덕이 되어줄 부(富)도, 권력도 없는 평범한 내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건 대한민국 입시라는 가혹한 현실뿐일 것 같아 두려웠다.
당시 같이 근무하던 후배 P도 나와 같은 말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십수 년이 흐른 지금, P와 나는 나란히 고등학생의 학부모가 되었다. 여전히 "아 진짜, 이놈의 고등학교! 이놈의 입시!"를 외치며, 여전히 길을 잃은 채로.
우리는 왜 도망치지 못했을까. 아니, 왜 도망치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 지옥 같은 입시의 한복판에서도 아이들이 가끔 보여주는 찰나의 성장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온기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N년 차 숙련된 교사'라는 타이틀은 K-고딩을 키우는 엄마로서는 그리 별스럽게 작용하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8교시의 서툰 엄마가 되어, 학교와 집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나와 내 아이의 솔직한 모습, 그리고 학교에서 만나는 학생들의 모습을 통해서 K-고딩과 그들 부모님의 불안하고 지친 마음을 조금은 위로할 수 있지 않을까?
나만 답답한 것이 아니었구나. 나만 불안한 것이 아니었구나. 생각보다 고등학생은 여전히 어수선하게 청소년기의 끝자락에 있는 존재들이구나 하는 공감의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고등학생을 자식으로 둔 모든 엄마들에게 동병상련의 위로와 공감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