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승부강요이론

처음 시작 발전 진화 도전 도약

by 정서윤

나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시작을 했을까 ?


나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도전을 했을까 ?


두 질문은 비슷해 보이지만 어떤 일은 불가항력적으로 시작될 때도 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다르다.

도전은 자의적인 시작을 의미하며 시작은 자의적, 타의적 시작을 모두 포함한다.

나는 항상 자신 안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이고 싶기 때문에 도전이라는 말에 더욱 매력을 느낀다.

돋울 도挑에 전쟁 전戰, 도전이란 스스로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며, 이것은 자기 문제에서든 타종의 문제에서든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의미한다. 요즈음은 도전이라는 말이 어떤 커리어를 쌓기 위해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로 축소되었으며, 고로 사람들을 사회의 노동자, 노예로 만드는 것을 포장하는 빛 좋은 선전용으로 많이 쓰이는 듯하다. 주인이 노예에게 넌 (네 일이 아니라 내 일에) 도전하는 멋진 사람이야! 하고 말하고, 노예는 도전이라는 말에 심취하고 도전하는 자기 모습에 심취하여 자신이 어디에서 도전을 하는지는 모른다. 우리가 도전해야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타의 문제와 맞서 싸우는 일은, 자신과 맞서 싸우는 일 뒤의 순서에 와야 값질 수 있다. 우리가 우선시 해야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의 도전이다. 혹은 도전의 초점을 자기 자신에게 맞추는 것이다. (오로지 내면의 문제는 자기 자신에의 도전이지만, 후자의 설명을 하자면 예를 들어 ‘내가 김대리보다 잘해서 승진해야지, 보다는 ’내가 이번에 얼마나 잘해낼지, 나도 궁금하군. 내 한계를 시험해보자.‘가 바람직하다.)

하지만 도전을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어 행하라는 말 이전에, 사람마다 편차가 존재하겠지만 도전은 하는 것조차 일정량의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니까 일정량의 겁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도전이 가치 있다. 라는 말로는 겁이 사라지고 용기가 나지는 않으므로 나는 실제로 몇 년간 스스로 용기를 낼 때 아주 효과적이었던 내가 개조한 사고개념을 몇 가지 소개하려고 한다.

첫 번째로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물리학자가 아니라도 한 번쯤 들어본 사고실험이라고 생각한다.

image.png The Quantum Divide : Why Schrödinger's Cat Is Either Dead or Alive. Christopher C. Gerry Kimberley

아마 사고실험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슈뢰딩거의 고양이’일 것이다. 이 실험에는 (가설의) 대학살이 벌어지며, 양자 세계 내에서 현실적인 자연을 묘사한 이 실험의 방식은 전 세계의 학생들과 이론가들로 하여금 어려움을 겪게 하고 있다. 이 실험의 기본적인 구성(다시 한 번 말하지만, 가상의 이론적 구성이다)은 이렇다. 50% 확률로 1시간 내에 방사성 붕괴될 확률이 있는 방사성 입자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입자를 상자 속에 독이 든 병과, 방사성 붕괴가 됐을 때 이 병을 깨뜨리는 장치를 함께 넣는다. 그리고 살아있는 고양이를 상자에 같이 넣고, 뚜껑을 닫은 뒤 한 시간을 기다렸다가 연다. 있는 대로 이해해보자면, 방사성 붕괴가 일어나 독이 유출될 확률은 50%이기 때문에, 고양이가 살아있을 확률은 절반이며, 또 다른 절반의 확률로 고양이는 죽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르윈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가 1935년 이 사고실험을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에게 처음 설명했을 땐,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일련의 양자 이론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즉 상자를 열기 전에 고양이는 동시에 살아있기도, 죽어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는 양자역학 내 불확정성 원리와 연결 지어진다. 어떤 측정이든 해낼 수만 있다면 그것이 현실을 바꿔 놓는다는 해석도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박은 장치 혹은 고양이가 이 목적의 측정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에선 하나의 양자 동전 뒤집기가 이뤄질 때마다 우주 전체가 자가 복사를 하고, 측정 결과는 단순히 이제부터 당신이 살아있는 고양이가 있는 세계에서 살아갈지, 죽은 고양이가 있는 세계에서 살아갈지 알려주는 것이란 것이다. (Why Schrödinger's Cat is still the most controversial thought experiment in science. Katie Mack. BBC science, 38-39. 2023.)


슈뢰딩거가 양자역학의 불확실성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사고 실험이다.

나는 양자역학에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고 꽤나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실험에 대한 해석을 내 삶에 대한 하나의 태도로 고정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어떤 측정이든 해낼 수만 있다면 그것이 현실을 바꿔 놓는다’는 해석은

내가 선택을 하느냐 안하느냐 그 자체가 현실을 바꿔 놓는다는 말로 다가왔다. 앞 문장을 표면적으로만 봤을 때는 당연한 얘기가 아니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이미 정해져있는 운명은 없으며 기적만 바라며 시간이 자신을 대신해 선택해주는 일에 편승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보자면, 당신이 짝사랑을 시작하여 그 사람에게 연락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은 연락하는 일이 그 사람이 당신을 당신처럼 좋아하고 있을지, 혹은 그 반대일지 ‘확인’하는 일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고양이는 이미 죽거나 살아있지 않으며, 바로 내가 상자를 엶으로써 고양이가 죽거나 살거나 결정되는 것이고 내가 연락을 함으로써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거나 혹은 관심조차 가질 기회도 없거나 결정되는 것이다. 확실하지 않음에 승부를 거는 것. 승부를 거는 것 자체가 승리임을 아는 것. 그것이 내가 삶을 사는 태도 중 하나이다.

행위 시점에서 우주가 복사되어 평행 우주가 생기고 자신이 선택한 우주에서 살게 된다는 두 번째 해석 또한 그렇다면 나는 어떤 우주에서 사는 내가 되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해주며 이는 어떤 도전이 망설여질 때마다 유용한 가이드가 되리라 생각한다.


‘사는 게 다 그렇다.’라며 세상에 못이기는 척 자신이 져주는 척 모두 포기해버린 것을 도가 튼 척하고 싶겠지만 마음은 중립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으며 혹은 선택의 필요성마저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시간이 자신 대신 선택하게 한다면 세상이 선택한, 세상이 만들어낸 모습으로 자신이 형성될 것이다. 우리는 항상 멈추어 반성적 시간을 가지고 세상과 사회의 폭풍바람에 더렵혀진 안경을 닦아낼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때도 모든 것은 흐르고 있고, 그 흐름 속에서 균형을 지키려고 힘쓰는, 폭풍에 저항하는 힘이 바로 도전挑戰이다.


우리는 언제나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한다.

중립은 가해자만 도울 뿐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침묵은 결국 괴롭히는 사람 편에 서있는 것이다.

- Elie Wiesel, 노벨 평화상 수상 연설 중


신은 중립을 좋아하지 않는다.

중립을 지키며 행동에 나서지 않는 사람이

신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우리 양심은 중립에 설 수가 없다.

신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 영국 사제 Charles Caleb Colton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

- Alighieri Dante


침묵은 가해자의 편이다. 양심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중립>에 관한 말들이다. 외부의 전쟁을 도덕적 측면을 바라볼 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하는 지에 대한 고찰을 주지만, 나는 이 말들이 내면의 전쟁에서도 아주 중요하게 적용되리라 생각한다. 내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만 하는 것. 가지기만 한 마음은, 가둔 마음은 사실 버린 것. 그러므로 내면의 욕구와 목소리에 침묵하지 않는 것. 나 자신의 가해자가 되지 않는 것이 어쩌면 도덕의 첫 걸음이 아닌가 제언한다. 문제를 피하는 것보다 틀린 답이 낫다. 평화는 칼끝이 가르키는 곳에 있다.


정말 참을 수 없는 건, 참지 못할 일이 없다는 거야 ... _ Arthur Rimbaud


image.png One comes home tired from working all day and finds a chair uncomfortable. Bruno Munari, Domus, 1944

이탈리아 미술가이자 디자이너 브루노 무나리의 포토에세이 중 한 편이다.

<불편한 안락의자에서 편한 자세 찾기>. 작가는 이 세상의 여성들이 지구라는 불편한 곳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그 속에서 생존하려하고 편안함을 찾으려 한다는 것을 설명한다고 하였으나 비단 여성뿐만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모습을 시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네 삶. 안락의자라고 불리는 ‘안락한 의자를 흉내내는 의자’를 정말 안락한 의자라고 믿고 우리 몸을 여러 번 구기고 불편한 곳이 생기면 또 다시 자기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뭘 믿고 있는 걸까? 안락하지도 않은 의자를 세상이 안락의자라 이름붙이면 그 이름만을 믿고 있지는 않은가? 계속 잘못된 걸 믿으면 또 다시 몸이 쑤실 것이다. 그리고는 또 다시 자기 탓을 할 것이다. 틀에 맞지 않는 자신의 몸을 탓할 것이다. 잘못된 믿음을 깨버리지 않으면 평생 거짓과 살 것이다. 거짓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 그것이 인간과 사회를 망치는 것이다. 세상과 사회는 사실 안락의자가 아니다. 자기 구원의 첫 번째 단계는 기존의 자기 자신을 망치는 것이다. 기존의 자기 자신의 믿음에 반기를 들어 싸움을 거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도전挑戰이다.


스크린샷 2026-01-17 오전 1.17.11.png Image : 좌측 Unknown, 중앙 Wolfram y=[x], 우측 Wolfram alpha y=x


요즈음은 나에게 시간에 따른 우리 발전의 단계 모습이 대각일직선(y=x)이 아니라, 계단 모양(y=[x])이라고 느끼는 순간이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매순간을 연속해서 발전하지 않는다. 현상을 유지하다가 어떤 사건이나 계기로 인하여 자극을 받고 도약하여 발전하고, 그 상태를 유지하다가 또 다시 도약이 반복되는 것이다. 바로 이 자신의 도약跳躍(돋울 도, 뛸 약)을 위해서는 자신을 딛고 반작용, 저항하는 힘으로 도전挑戰해야한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요즘 크게 다가오기 때문에, 내면의 도전이든, 외부의 도전이든 내가 이것을 도전하면 얼마나 발전해있을까? 하는 긍정의 힘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성숙해져 나이를 먹으면 생기는 지혜 정도는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그것은 y=n 그래프의 모습으로 그저 x축, 즉 시간만이 자신의 넓이를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하물며 전자도 도약을 한다. 맨 왼쪽의 이미지는 전자의 state를 나타낸다. 전자가 외부에서 얻는 에너지가 원자핵과 결합된 에너지를 넘어설 때, 전자는 Ground state에서 Excited state로 점프, 도약하는데 여기서 state가 연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인 원자 안의 전자도 도약하는 형상이 계단인데, 어찌 인간이 아닐 수 있단 말인가? 저절로 발전한다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우리는 정말 발전하고 있을까 ?

나는 앞서 도약으로써 자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역사를 ‘발전’ 과정으로 보는 관점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저차적인 것에서 고차적인 것으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느슨한 것에서 체계적으로 나아가는 발전과정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발전’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우리의 역사를 재구성할 때 과연 발전했는지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인류는 기원전 30000년전에 이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동굴 벽화가 과연 지금의 그림보다 미개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때의 인간성과 사고방식을 지금보다 미개하다고 할 수 있을까? 산업화 이전의 생활 방식이 지금보다 미개하다고 할 수 있을까? 지금에 이르러서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에 대한 인식이 대두되며 점차 차별을 없애기 위한 노력이 전지구적으로 행해지고 있다고 예를 들어 반박할 수 있겠으나 구석기인들은 사회에 계급조차 없었으며 성에 대한 차별 또한 없었던 것으로 거론되어진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현생 인류의 조상)가 과연 오스트랄로피테쿠스보다 인간성의 측면에서 ‘진화’한 것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 현재의 인류는 생존만을 이유로 살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언급조차 심지어 추측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이유로 서로를 혐오하고 해하고 살인한다. 인간에 맞먹는 기계를 생산하고 있고 우주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가고 있다는 것만이 과연 인간이 발전하고 있다는 이유로 충분한지 생각해보아야한다.

image.png Pale blue dot : a vision of the human future in space. Carl Sagan. 1994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므로 배워야하며, 상대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므로 배려해야하며,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므로 검증해야한다, 무지를 그대로 두지 않으며, 차오르는 오해를 그대로 두지 않고, 의심을 검증하고자 진실을 추구하는 것. 아주 먼지 같은 창백한 푸른 점 안에 살고 있는 우리를 진정으로 소통하게 해줄 그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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