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론으로의 전도

세상이 있으니 내가 있다

by 정서윤

나는 양자물리학을 좋아한다.

양자물리학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간단하고, 또 흔하다.

학부시절 좋아하던 교수님이 양자물리학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는 누가 봐도 괴짜였다. 키는 장대같이 크지만 호리호리한 체격 때문에 걸어 다니는 팔척인간같다. 머리는 가운데가 비었고 몽땅 하얗다. 말투는 가끔 못 알아들을 말이 있을 만큼 약간은 특이하다. 그는 수업 시간에 항상 다른 얘기를 했다. 통으로 자기 머릿속에 있는 얘기를 하느라 진도를 나가지 않은 적이 허다했다. 그러면 그냥 아, 오늘은 다른 얘기를 하느라 시간이 다 됐네요. 그럼 다음에 봅시다. 하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제일 먼저 나가버렸다. 그런 그가 언제나 하던 말은 “여러분 책을 읽으세요. 책을. 책을 읽지 않으면 짐승이나 다름없는 거라.”였다. 과 사무실 앞에는 항상 그가 시킨 알라딘 책 박스가 있었으며 언제나 스스로 그걸 가져갔다. 그리고 학생에게도 존댓말을 하는 몇 안 되는 교수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데 내 동기들이나 선배들은 물리학 시간에 펼쳐지는 그 교수님의 철학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옆에서는 “아 또 수업 안 해...” 나 “아 또 시작이다 ...” 등등의 가벼운 야유 ... 난 솔직히 그의 수업이 제일 재미있었고 그가 또 다른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싶었다. 모든 에세이가 쓰레기라는 것도 그에게서 배웠다. (ㅋㅋ) 그가 철학 수업을 연다면 제일 먼저 신청하는 사람은 나일 것이다. 어쨌든 그가 2학년 수업인가, 그 때 양자물리학을 가르쳤다. 그는 일반물리학은 물론 양자물리학의 방정식을 모두 알고 있었고 언제나 책 없이도 칠판을 꽉 채워 정확히 방정식을 도출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괴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일이 끝나고 책 읽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는 다 떨어져 가는 미니카를 타고 다녔다. 그는 정말 괴짜였다. 그는 물론 그가 가르치는 양자물리학도 내게 아주 매력 있게 다가왔고 학부 시절부터 양자물리학에 조금이나마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양자물리학에 관심을 가지게 해준 나의 괴짜 같은 교수님을 소개해주고 싶었다.

김효진 교수님.


이런 관심이 나를 몇 년 전에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는 책으로 이끌었고 이번에는 그의 신작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으로 이끌었다.

전자의 책이 먼저 나왔으나 양자물리학 초보자는 후자부터 읽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진작에 카를로가 양자물리학의 처음부터 현재까지 소개하기 위해 썼기 때문이고,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일반물리학이나 양자물리학을 아예 모른다면 읽기 힘들다.


어쨌든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는 책에서도 너무나도 감명을 받아 시 한편을 썼는데(궁금하면 오백원),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나의 사고방식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아니, 굳이 따지만 바꾸어 놓았다기보다는 희미하던 나의 사고방식을 확실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안경을 쓴 듯한 느낌, 눈을 뜬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는 그의 전개에 인덱스를 많이 붙여놓았으나 감명받은 과학적 태도보다는 좀 더 양자물리학쪽의 서술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이 세계 속에 있는 것은 확정된 속성을 가진 서로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게다가 상호작용할 때만 속성과 특징을 갖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중략) 따라서 양자 세계는 기존 물리학에서 상상했던 것보다 더 무르며, 일시적이고 불연속적인 사건들과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치 베네치아 레이스처럼 정교하고 복잡하면서 연약하게 짜인 세계죠. 모든 상호작용은 사건입니다. 실재를 엮는 것은 이 가볍고 덧없는 사건이지, 철학이 상정한 절대적인 속성을 지닌 무거운 물체 같은 것이 아닙니다.” 106~107p


과연 내가 모른다면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고 애인은 내가 몰라도 존재하긴 하는 거다. 라고 답했다. 우리는 서로 아는 ‘김성진’을 가지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김성진을 몰랐을 때는 나에게 김성진은 존재하지 않았다 ..

하니 애인은 그래도 성진씨는 어딘가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니까 존재하는 것이다 ..

라고 답했다 ..

그러자 나는 스폰지밥 시간여행 에피소드를 예로 들며 말했다. 거기에는 무차원에 떨어진 징징이가 표현된다. 만약에 그곳에 아기를 놓는다고 생각해봐 .. 아기는 타인으로부터 ‘나’라는 존재를 구분해낸다는데 .. 거긴 타인이 없으니 ‘나’라는 존재도 구분할 수 없어 .. 그러니까 그 아기는 평생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자기 자신도 없는 채로 결국 죽고 말걸 ..

그러자 애인이 답했다.. 그래도 그 아기는 있는 거잖아?

자 .. 양자물리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 내가 이겼다. 이기려고한 대화는 아닌데 내가 이겨버렸네. 내가 뭐랬어? ^^

image.png 네모바지 스폰지밥 시즌 1 EP. 징징이의 시간여행


양자론은 원자, 원자핵, 소립자, 화학결합의 물리학, 고체와 액체, 기체의 물리학, 반도체, 레이저, 태양과 같은 별의 물리학, 중성자별과 원시우주의 물리학, 은하 형성의 물리학, 생명 의학, 컴퓨터 등은 모두 양자물리학의 개발로 이루어졌습니다 .. - 카를로 로벨리. (반박 안 받음, 내 말이 맞음.)

그러니까 타인이 있어야 내가 있고, 그 상호작용 자체가 속성을 정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근본 속성은 없다. 그저 타인과 그 사이에서 만들어내는 관계에서 나의 속성이 생기는 것이다. 타인마다의 상호작용이 다르기 때문에 나의 속성은 그 때마다 달라진다 .. 그 무수한 상호작용이 네트워크를 만들고 그것이 나에게 ‘나’라고 인식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전제가 송두리째 뒤집어진다. (결국에 ‘나’도 하나의 구분이다.)


“각각의 대상은 하나의 ψ파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과 상호작용하는 다른 모든 물체에 대해 다른 ψ파동을 갖죠. 한 사물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사건은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확률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109p

(+ 그런데 양자론적으로는 미래가 과거로 정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 또한 평소 의문과 일맥상통하는 바 있는데, 세계 미술사를 읽으며 든 생각이다. 왜 과거는 반복된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이것에 의문이 들었다.

과연 과거는 정말 반복되는가? 각 사건은 맥락에 영향을 받는데 100년 1000년 10000년 후에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고 해도 그것이 전제가 같은가? 외부의 맥락이 같은가? 라는 질문이 들었다. 과연 패턴이란 존재하는가? 패턴이라는 것도 하나의 거시적인 관점의 산물이 아닐까.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모두들 동그란 원을 그리며 떨어지는 패턴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같은 자리에 그대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하나라도 있을까? 옆에 빗방울과 정확히 같은 파동으로 공명하는 빗방울들이 한 쌍이라도 있을까? 이것은 아직도 의문이다.

양자역학의 나비효과를 보아서도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살면서 너무 많은 변수 속에 살고 있는데 변수 하나만 추가되어도 미래의 경우의 수가 몇백억개가 늘어난다고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변수 하나를 추가하는 것도 내 미래를 바꿀 수 있으며, 변수 하나만 추가되어도 바뀌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내 탓이 아니라는 위로도 준다. 그래서, 근데 패턴이라는 것이, 예측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있냐고 ???)


흠흠 다시 돌아가서 ..

여기서 큐비즘QBism이라는 사고방식을 한 예로 들 수 있는데 .. 큐비즘의 핵심 발상은 양자 파동함수 ψ는 우리가 세상에 대해 가지는 ‘정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큐비즘은 우리가 보거나 측정할 수 있는 것너머, 세계의 실제 모습을 그리려는 일을 포기한다. 과학의 목표가 단순히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실재에 대한 그림을 제공하는 것임을 기억해야한다. 이러한 면에서 큐비즘은 과도한 관념론에 빠지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관찰자 자신도 관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라는 단순한 사실을 말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이 세계가 견고하고 연속적이라는 생각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지만, 사실 거기에는 세계의 실재의 결이 실제로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견고하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거시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죠. 전구는 연속적인 빛이 아니라 수많은 아주 작은 광자를 내뿜고 있습니다. 실제 세계는 작은 규모에서는 연속적이지도 견고하지도 않으며, 불연속적인 사건들과 상호작용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을 뿐입니다.” 108p

그래, 모든 구분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의 거시적인 관점은 바로 우리에게 달린 ‘눈’에서부터 시작된다. 옛날옛적 ‘제강’이라는 혼돈의 신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온몸이 한 덩어리이고 얼굴과 눈이 없다. 하지만 혼돈의 신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하여 노래하고 춤도 추었다.

“사람은 누구나 눈, 귀, 코, 입의 일곱 구멍이 있어서 그것으로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이 혼돈에게만 없다. 어디 시험 삼아 구멍을 뚫어주자. 그래서 날마다 한 구멍씩 뚫었는데, 7일이 지나자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 [장자의 우화 <혼돈칠규> 중]

image.png 혼돈의 신, 제강

혼돈은 현재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질서가 없는 상태가 아니다. 혼돈은 ‘애초 사물이란 없다고 생각하는 무의 경지’인, ‘미분화’. 즉, 구분이 없는 상태이다. 장자는 애초 사물이란 없다고 생각하는 무의 경지, 그 다음 경지는 사물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구별을 두지 않는 경지, 그 다음 경지는 구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시비를 고려하지 않는 경지가 있다 하였다.

우리 인간은 일곱 개의 구멍이 뚫렸고 거시적인 관점으로 구분하고 시비를 가려 점점 죽음에 이르게 된다. 역시 모든 구분이란 인위적인 것. 자연은 구분 없이 모두에게 평등하듯이.

이어지는 관련된 내용이 있다.

“우리는 보통 세계를 큰 규모에서 보기 때문에 이 세계의 입자성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수많은 작은 변수들의 평균치입니다. 너무 많은 변수가 관여하기 때문에 요동은 무의미해지고 확률은 확실성에 가까워집니다. 고전 물리학적 세계상은 그저 우리가 근시안적이기 때문에 견고한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고전 물리학의 확실성은 단지 확률일 뿐입니다. 옛 물리학이 제공해 온 선명하고 견고한 세계의 이미지는 사실 환상이었던 것입니다.” 138~139p


그래, 우리는 평균적인 모습을 기준으로 잡고 그것에서 벗어난 사람을 보고 ‘이상하다’, ‘특이하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확실하지 않은 세계를 너무 확실하게 보고 있다. 세상은 요동하고 있으며 미시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모두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인 것이다.

또한 이것은 여담이지만 이 부분을 읽으며 정말 초현실은 동화나 환상 이야기같이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정말 우리를 이루고 있는 진짜 현실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우리가 절대 명확히 알 수 없는, 하지만 우리가 절대적으로 살고 있는 이 진짜 현실이 너무나도 초현실적이라고 느낀다.


“세계를 기술하는 데 사용되는 요소는 각 물리계의 절대적 속성이 아니라, 물리계들이 서로에게 나타나는 방식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무엇이 가능해지게 했나? 바로 양자역학의 관계론적 해석이다. 역사는 과정이고, 지식도 과정이다. 지식은 하나의 결론이 아니며 성장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의 결론과 절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과 관계 속에 살고 있다.


“존재는 작용δύναμις일뿐이다.” 플라톤.

(δύναμις를 검색하니 ‘약함’이라는 의미인데 뭘까 ..)


“세계는 독립적인 실체들로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편의에 따라 여러 사물로 나누어놓았을 뿐이죠.” 173p

나가르주나नागार्जुनः 2-3세기의 인도 철학자

“언어가 표현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가르주나नागार्जुनः 2-3세기의 인도 철학자


나가르주나는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저 내가 한 요소를 관례적으로 ‘나’라고 부를 뿐이라고 ... 우리 존재의 참된 본질이라고 할 궁극적이거나 신비로운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는 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광대하고 서로 연결된 현상들의 집합일 뿐이며, 각각은 다른 것에 의존하고 있다.

모든 것은 ‘공’, 부재이며, ‘공’조차도 본질이 비어있다. 세상을 이루는 상호의존성을 생각하면 자립적 본질 따위는 잊어버려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


“실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얇고 연약한 베일일 뿐이며, 그 너머에는 ... 아무것도 없습니다.” 184p

“마음의 본질을 알고 싶다면, 내적 성찰은 최악의 탐구 도구입니다. 자신의 뿌리 깊은 편견을 만나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될 것입니다.” 216p


하지만 ‘나’라는 존재가 없다면, 내가 느끼는 이 모든 것은 무엇인가? 나의 마음, 직관은 어디에서 오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가 있겠죠 .. 카를로 로벨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려진 자연법칙 내에서 점점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알려진 자연법칙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우리의 정신생활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알려진 자연법칙으로는 우리의 정신생활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론들도 있지만,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 ‘내게는 그럴법해 보이지 않는다’는 모호한 말을 논리적 근거 없이 직관에만 의존에서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미국 철학자 에릭 뱅크스의 말대로, ‘심신 문제는 우리에게 신비로운 문제이지만, 자연에게는 해결된 문제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한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자연이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이해하는 것뿐’입니다.”


자연에게 이미 해결된 문제라는 부분이 나를 다시 겸허하게 한다. 그는 이미 그렇게 했고,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 또한 자연을 너무 신비화해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관련해서 재미있는 이론이 있었는데, 인간은 우리 마음의 작동 원리를 알기 위해 우리의 뇌 안의 작은 양자들이 우리의 마음과 같은 비슷한 걸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을 세웠다고. 근데 카를로 로벨리가 그러면 의자 원자는 모두 의자 모양이냐고 그랬는데 진짜 빵 터졌다. ㅋㅋㅋㅋㅋㅋ 여기서 진짜 더 재미있는 것은 비슷한 내 경험인데,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애인과 학교 학식을 먹고 있었는데 ‘부분과 전체는 같은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아니라고 하고 애인은 맞다고 했다. 근데 내가 거기서 반론을 할 때 철로 만든 의자를 가리키며 그럼 철 분자도 의자냐?? 라고 하였다. 그래서 애인은 아! 이러고 바로 자신의 의견을 철수했다. 이번에도 내가 이김 ... 분하지 ? 메롱


그리고 알게 된 엄청난 재밌고 새로운 사실

“대부분의 신호는 눈에서 뇌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뇌에서 눈으로 이동합니다. 뇌는 이전에 일어난 일과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무언가가 보일 거라고 예상합니다. 뇌는 눈에 보일 것으로 예견되는 상을 만듭니다. 이 정보는 중간 단계를 거쳐 뇌에서 눈으로 전달됩니다. 뇌가 예상하는 것과 눈에 도달하는 빛 사이에 불일치가 감지되면, 그때만 신경 회로가 뇌로 신호를 보냅니다. 즉, 관찰된 주위의 이미지가 눈에서 뇌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예상하는 것과 불일치하는 정보만 전달되는 것이죠. 이것이 환경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하는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뇌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만 해주는 신호를 뇌에 보내는 것은 쓸모가 없을 테니까요. (중략)

우리가 주변을 둘러볼 때 우리는 실제로 ‘관찰’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세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무의식적으로 불일치를 탐지하여, 필요한 경우 수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보는 것은 외부를 재현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상하고,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정보로 수정한 것입니다. 뇌는 표상을 만들어내고, 관찰된 불일치를 기반으로 예측의 오류를 부단히 최소화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19세기 프랑스 철학자 이폴리트 텐의 말을 빌리자면, ‘외부 지각이란 외부 사물과 조화를 이루는 내면의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지각을 ‘환각’이라 부르는 대신, 외부 지각을 ‘확인된 환각’이라고 불러야겠습니다.”


!!! 정말 너무 신기하다 ... 정말 내가 인식하는 세상은 환각인 것이다 ... 매일 실제로 이렇게 보고 있으면서도 신기해하는 것도 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처구니가 없는가.. 그러니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기반으로 불일치만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는 것인데,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바꾸는 데에는 얼마나 큰 고찰이 필요할까 생각된다. 그래서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기반 자체를 바꾸는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닌가 한다. 절대적인 시공간의 개념을 상대성이론으로 뒤집은 아인슈타인처럼 ..


그리고 또 하나 ‘이 세상이 환각이라면 다 부질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사실 내가 옛적에 지니고 살던 생각이다. 하지만 저 생각도 사실 부질없다. 나는 현재로선 이 환각, 환상적인 세계에 자신의 환상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진정한 인생의 승부사라고 생각한다. 삶은 바닷가에 모래성을 짓는 일과 같은 것 같다. 어차피 무너진다고 모래성을 하나 짓지 않고 떠나는 사람보다는 매번 오는 파도에 무너져도 가장 아름다운 모래성을 지으려는 사람이 진정한 삶을 사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계속 언덕 위로 돌을 굴리는 시지프처럼.

image.png 신들로부터 영원히 고통받는 시시포스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나도 네트워크의 일부분일뿐.

하지만 나도 네트워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도.

양자론은 나를 적극적인 네트워크를 지향하게 하면서도 겸손하게 만든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론이다.

카를로 로벨리가 인용한 시의 한 부분을 소개하고 끝내겠다.

나는 이 구절을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계속 곱씹었고 내 마음이 정말 찬란해졌다.

말 그대로 사실인 어구.

‘우리는 꿈과 똑같은 재료로 빚어졌다.’

셰익스피어 <템페스트 Act4, Scene1>




<양자론으로의 전도> 끝.


*푸른색의 문구는 모두 인용문이며, 출처 없이 페이지 표기만 했거나 페이지 표기가 없는 인용문은 모두 카를로 로벨리의 <나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인용.

*모든 이미지는 나무위키의 오픈 이미지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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