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린 언니는 그렇게 계속 하얘지더니 얼음 공주가 된 것 같다.
그 후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학업을 이유로 할머니댁에 자주 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 집에 가면 더 이상 해린 언니와 유진이, 동진이는 없다. 해린 언니는 혼자 밖에 나가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작은이모는 그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집을 나간 해린 언니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녀의 표정은 굳어지고 이내 욕을 한다. '냉정한 년'이라고. 이제 언니가 어디에 사는지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해린 언니는 그렇게 계속 하얘지더니 얼음 공주가 된 것 같다. 하지만 작은이모가 열을 내는 것이 그 당시 나로선 이해되지 않았다. 거의 태어날 때부터 같이 살지 않았는데 성인이 되고 정을 붙이는 것은 남과 가족이 되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피의 힘이란 정말로 존재하는가. 난 아직도 잘 모르겠다. 반면 유진이와 동진이는 작은이모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드디어. 유진이와 동진이는 그 당시 그 사실을 우리에게 실컷 자랑했다.
“우리 이제 엄마랑 같이 살아! 다음 주에 엄마 집으로 이제 가는 거야. 학교도 벌써 엄마가 알아봤대.”
나는 ‘엄마 집’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어색하게 들려 잠시 당황한다.
“아 진짜? 좋겠다. 어느 학굔데?”
“송화고. 동진이는 바로 옆에 송화중. 근데 교복이 문제야. 동진이랑 나랑 둘 다 이제 입학인데. 둘 다 사야 되잖아. 울 엄마 돈 없는데.”
유진이의 긴 속눈썹에 내려 앉은 무게. 송화동이면 할머니댁과 거리가 꽤 된다.
“아, 나 송화고 알아. 교복은 입학 전에 학교에서 졸업하는 사람들이 물려주려고 기부하는 게 있다고 들었어 ... 한 번 가봐.”
“진짜? 아싸! 엄마한테 말해줘야지! 연이 넌? 어디 갔어?”
“난 문종고.”
“헉, 거기 공부 잘 하는 애들이 가는 데 아냐 ? 하긴 연이 넌 ...”
“아냐 ....”
“새이는?”
“새이는 은천중.”
“우와 거기두 ...”
“아냐 ....”
할머니는 용케 성인, 고등학생, 중학생을 길러내셨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이 모두 여길 떠난다면? 그녀는 너무 외로워지지 않을까. 말이 통하지 않는 또 하나의 아기와 함께. 아직 영아인 수진이는 역시나 할머니가 계속 맡아 키우게 된 것이다. 아주 가끔 할머니댁에 가게 되면, 고등학생인 나와 중학생인 새이가 수진이를 놀아주기 시작한다. 웬만한 아기는 귀여운 법이기도 한데, 수진이는 제 아빠를 닮아 지극히도 못생겼다. 어떻게 작은 이모를 하나도 닮지 않았을까? 아기에게 무슨 죄가 있으련만, 그래서 더 정이 가질 않는다. 나이 차이가 많아 물려줄 옷도 없고 장난감도 없다. 나는 놀아주다 지쳐 새이에게 수진이를 버려두고 카페트에서 일어나 할머니가 있는 식탁에 앉았다. 할머니는 허공을 바라보는 일이 더 잦아졌다. 음식 재료를 손질하는 일도 줄었으며, 그녀의 몸무게도 점점 더 줄어간다. 나는 텅 빈 식탁 한 쪽에 덩그러니 있는 분유통을 열어본다.
“그거 없셔. 다 떨어졌을 겨.”
할머니가 날 보더니 이야기한다. 정말 바닥이 훤히 보인다.
“그럼 수진이는 어떡해요?”
“몰러. 니네 이모가 오늘 오던가 해야 되는디. 맨날 온다구 하구선 안 워. 지 새끼 굶게 생겼는디.”
나는 새이 앞에 놓인 수진이를 바라본다. 수진이는 아직 통통하다. 오히려 굶는 쪽은 할머니인 것만 같다. 마치 수진이가 할머니의 양기를 모두 쪽쪽 빨아먹는 듯이 할머니의 손과 팔은 나뭇가지처럼 점점 더 깡말라간다. 잠깐 할머니댁 근처에 장을 보러 나갔던 엄마와 아빠가 돌아왔다. 그 손에는 먹을 것이 잔뜩 들려있다. 식탁에 놓인 박스와 장바구니 안에서 나는 분유를 찾았다.
“엄마. 분유도 사야 돼. 다 떨어졌대.”
엄마는 분유까지는 미쳐 생각하지 못했다. 당연히 있으리라 생각했겠지.
“분유? 분유가 왜 떨어져?”
엄마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분유통을 직접 열어봤다.
“이런 미친 ...”
엄마는 고개를 들어 이마를 짚더니 이내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엄마, 엄마 걔 안 와? 지 새끼 분유는 사다놔야 할 것 아냐? 여기 맡겨 놓고선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느라 안 와?
“몰러. 낸들 알어.”
할머니는 엄마의 시선을 피하고 있다.
엄마는 이미 전화를 들었다. 뚜루루... 뚜루루... 달칵.
“응 왜?”
전화를 잘 받지 않는 이모가 웬일로 전화를 한 번에 받는다.
“야, 왜라니. 너 여기 안 오니? 수진이 분유도 없는데. 뭐하자는 거야 지금.”
나는 엄마의 전화를 듣다가 할머니는 글자를 몰라서 오는 전화만 받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 오늘 가려고 했어! 진짜, 없으면 좀 언니가 사다주든가!”
통화 너머 작은 이모의 목소리. 우리는 전부 듣고 있다.
“야 !!!니 새끼 밥을 왜 내가 사 !!!”
엄마는 잔뜩 화가 나서 전화를 뚝 끊었다. 분위기가 숙연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수진이는 그저 새이를 귀찮게 하고 있다. 나는 문득 생각이 들었다. 해린 언니, 유진이, 동진이는 뭘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