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피(4)

알고 있다는 것, 그것이 나를 가로막는다.

by 정서윤

행방불명이 된 해린 언니를 다시 만난 것은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였다. 어느새 대학생이 된 나는 방학이 되고 서울에서 잠시 집에 내려와 머무르고 있었다. 해가 참 좋은 날. 그 날은 무슨 바람이 불어 굳이 집 앞의 강을 건너 해가 잘 드는 커피 집에 가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 점심을 간단히 먹고 약간은 뜨거운 태양을 책 하나로 가리며 다리를 건너고, 강변길에 늘어진 카페 거리를 둘러다보다 적당한 곳을 찾아 들어갔다. 그곳에, 다름 아닌 해린 언니가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커피집. 언니는 카라멜색 앞치마를 두르고 혼자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나는 해린 언니를 한 눈에 알아보았고, 뛸 듯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언니!”

해린 언니의 각진 얇은 어깨. 단정하게 묶은 검은 긴 머리. 부러질 듯한 허리. 언니는 선마저도 희미하다. 해린 언니는 곧이어 커피머신을 등지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돌아다봤다. 언니의 눈이 커다래지다가 이내 당황한 표정이다.

“어 ... 연아.”

언니는 작은이모처럼 나를 ‘연이야’가 아니라 ‘연아’라고 부른다. 언니는 몇 년 만에 만난 내가 그리 반갑지 않은 듯한 낮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언니의 목소리는 원래 희미했으므로 ... 나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언니! 이게 몇 년 만이야. 와, 언니, 보고 싶었어. 여기서 일하는 거야?”

내 들뜬 목소리 때문에 그녀는 약간 뒤로 물러나 있는 듯하다.

“응... 정말 오랜만이다, 연아.”

“응, 진짜로! 언니 계속 여기서 일했어? 유진이랑 동진이도 언니 어디 있는지 모른대서. 언니 ... 뭐하고 살았어? 어디 살아?”

나는 너무 반가운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옛날의 어릴 때로 돌아간 것처럼 하얀 해린 언니에게 해맑게 매달렸다.

“응... 여긴... 일한지 얼마 안됐어. 여기서 멀어. 사는 곳은. 넌 잘 지내니 연아?”

언니의 목소리는 나의 해맑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밑으로 떨어지는 듯 멀다.

“응, 난 학교 방학해서 집으로 잠깐 내려왔어. 언니! 진짜 보고 싶었어.”

“연아, 뭐 마실 거야? 내가 해줄게.”

언니는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지갑을 그 하얀 손으로 꾹 누르며 이야기한다. 어른이 된 해린 언니는 더 예쁘고 더 하얗다. 작은 이모를 제일 많이 닮았다. 아니, 작은이모보다 더 예쁘다. 언니의 아버지는 미남이었을 것이다.

“헉, 아니야 언니. 사야지.”

“괜찮아. 어차피 혼자 일하니까... 자리에 가 있어.”

뒤에 오는 무더기의 회사원 손님들 때문에 나는 해린 언니의 말처럼 구석 자리에 밀려나듯 앉았다. 자리에 앉아 커피를, 아니 해린 언니를 기다리며 가져온 책을 펼치지 못했다. 묻고 싶지만 물을 수 없는 수많은 질문들. 아무것도 모른 척 묻고 싶지만 아무것도 모를 수가 없는 나. 알고 있다는 것, 그것이 나를 가로막는다. 우리는 가족이지만 서로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가족이어서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을 알게 된다. 해린 언니는 성인이 되자마자 연락이 두절되었고, 그 사실은 유진이, 동진이를 언니가 어디 갔는지에 대한 질문받이가 되게 만들었다. 유진이와 동진이는 항상 모른다는 말로 일관했지만 후에 유진이는 해린 언니와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왜일까, 항상 묻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해린 언니가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언니, 어디 있었어?”

“언니, 왜 숨었어?”

“언니, 왜 집을 나갔어?”

“언니, 그동안 왜 한 번도 오지 않았어?”

“언니,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언니, 그동안 얼마나 슬펐어?”

묻고 싶지만 묻어두는 것들. 묻는 입김에 흔들리는 촛불 같은 언니가 꺼질 것 같다. 언니가 있는 곳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나 혼자 다짐한다. 해린 언니가 있는 이곳에서 나, 마음 편히 책 읽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과 함께 해린 언니가 곧 가져다준 커피가 내 말문을 더 힘껏 막는다. 커피 향기가 햇살을 타고 스며든다. 따뜻한 커피를 호록 몇 입 조금씩 마신다. 속이 쓰리다. 강변 가로수 사이로 햇빛이 길게 늘어진다. 그 빛 끝에는 해린 언니가 있다. 언니를 보면 볼수록 그 빛이 길게 늘어져 시선에서 멀어지는 것만 같다. 나는 언니를 붙잡으려고 그만 벌떡 일어난다.

“언니, 나 갈게.”

해린 언니는 나를 다시 돌아본다.

“... 벌써?”

“응, ... 친구가 불러서. 언니, 나 말 안 해.”

해린 언니는 말이 없다.

“언니. 이거 재미있어. 이미 읽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언니 책 좋아하잖아.”

나는 나도 다 읽지도 못한 책을 해린 언니에게 건넸다. 곧 날아갈 것 같은 언니에게 중력을 달기 위해.

“... 고마워, 연아. 또 와. 알겠지?”

“알겠어. 언니. 커피 고마워! 나 갈게.”

하지만 이 이후로 언니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6년이 지난 지금까지 없다. 2년 전, 그 때도 여름, 그 때도 강변이었다. 이어폰을 끼고 밤산책을 나와 걷던 중 저 앞쪽에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걷는 해린 언니를 발견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해린 언니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긴 머리는 풀어헤쳤고, 목적지를 두고 가는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언니는 걸음을 멈췄다가 걸었다가를 반복했고 강을 건너는 돌다리에 도달해서는 돌마다 앉아 긴 머리끝이 물에 젖을 정도로 몸을 숙여 그 강물 밑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의 강 밑을 바라보면 무서울 텐데. 언니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나는 그런 언니가 내 산책길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짧은 찰나, 그것이 해린 언니의 내 마지막 기억이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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