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트는 내용물에 따라 명칭이 달라진다-껍데기/외피/더블 레이어
타르트는 내용물에 따라 명칭이 달라진다-껍데기/외피/더블 레이어
강현, 강희조, 김성민, 박정서, 이십칠 미식회 일동
https://www.instagram.com/subculture_yum/
2월 28일까지 진행되는 수건과 화환 <해버싯 텍스트 페어>에서 구매한 독립출판물이다.
일본의 종교학자 야마모토 시치헤이, 소설 <전신소설가> 속 주인공 이노우에 미츠하라는
'자아를 수정'한다.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이자야 벤-다산(Isaiah Ben-Dasan)'이라는 또 다른 필명을 설정한다. 이자야 벤-다산은 고베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라는 설정으로, 일본에서 자란 유대인의 관점으로 '일본 문화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사례로부터 '일본교'라는 일본적 사고방식과 영성을 도출해 내고 이를 광의의 '유대교' 개념과 비교한다. 또한 <전신소설가> 속 이노우에 미츠하라는 자신의 일대기를 쓴 '자작연보'를 집필하는데, 이 연보 속 이야기는 전부 거짓임이 밝혀진다.
"완벽한 연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고 하면서 '총체'로서의 인생으로부터 임의적으로 선택하고, 임의적으로 누락한 것들이 존재하고 선택한 것들의 조합이 곧 '픽션'이라고 말한다. (...) 이노우에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꾸며내고 그 꾸며낸 자아상을 다시 적극적으로 연기한다. 05쪽
이러한 자아수정주의는 1970년대 일본의 '포스트모던' 속에서 소아병처럼 보이기도 하며, 90년대 '심리 세미나'적인 '정신개조(사회를 바꿀 수 없으니 나를 바꾼다)'로 보이기도 하지만, 두 작가의 작업은 역사를 다루기 위해 자아를 편집한다고 저자(강현)는 주장한다.
'자아 수정'의 뒤에는 그 수정의 방향성과 내용을 지시하는 흔들림 없는 자아-'자아의 비수정'이 위치한다. 마치 자아 수정에 있어 큐사인과 디렉션을 넣는 감독과 같은 자아는 도리어 강고한 신념이나 이념으로 다가온다. 07쪽
저자는 자기애적인 '정체성'의 창작 작법이 일반화된 현대 사회 속에서 MBTI, 젠더 및 성적 지향성, 인종, 정치 성향, 소비 취향 등의 무수한 기호들의 조합으로 자아를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현대 사회 속에서 '세련되고 말끔한 자아상을 만들어내고 나와 비슷한 기호 다발로 묶인 타자들을 발견해 느슨한 공동체에서 아무런 마찰없이 소통·교류한다. 자아는 알고리즘이 만들어내는 최적함, '개인 맞춤화'의 환경 속에서 자아는 더 이상 역사나 신념을 담아낼 수 없는 단일하고 고정된 기호로서 한 '개인'으로 쪼그라든다.' 07쪽
강현의 글은 한병철이 지적했던 '자아비대'를 떠오르게 한다.
한나 아렌트는 개인의 삶이 근대에 와서 “인류 전체를 지배하는 삶의 흐름 속에 완전히 잠겨버렸” 으며 남아있는 능동적인 개인적 결단 가능성은 “자신을 놓아버리는 것,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는 것” 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노동을 통해 인류의 익명적 삶의 과정 속에 용해되어버릴 만큼 자신의 개성이나 자아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거의 찢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자아로 무장되어 있다. <피로사회, 한병철> 자아 수정, 즉 '픽션을 향한 운동', '허구에 대한 집착'은 허구를 그 자체로 목적화하지 않고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아마도 현대사회 속 많은 피로들은 '자아비대'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고정된 자아를 버리고 수정해보자. 원래 '나'란 없으니. 무장해제! 무아無我: 고정되고 불변하는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교설
저자(강희조)는 대만 일러스트레이터 루루 린(Lulu Lin)의 얼굴들, 에스파 정규 1집의 컨셉 포토들, 영국의 포토그래퍼 잭 블리드글랜드(Jack Bridgland)와 메이시커즌(Maisie Cousins)의 작품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로테스크(Grotesque)에 주목한다. 이 기괴하고 불완전한 겉모습은 오랫동안 비주류로 여겨지다 요즘엔 트렌드가 되고 있다고 지적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프로이트의 'das Unheimlich'의 정의를 차용한다. Heimlich는 '친숙한', '안락한', '내밀한' 등을 의미하고 이것이 발전해 '숨겨진', '비밀스러운'으로도 작용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Unheimlich'에 의해 환기되는 무서운 감정을 '감춰져 있어야 할 비밀스러운 것이 겉으로 드러날' 때 느끼는 감정을 가리킨다는 셸링의 말을 떠올린다. (...) 이로부터 그는 'Unheimlich'를, 더 정확히 말해 'Heimlich-Unheimlich'를 우리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억압되어 있던 것이 회귀해 올라오는 순간에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라고 결론을 내리며, 이를 'das Unheimlich'라고 정의했다. 09쪽
기괴하고 불완전한 것(그로테스크)가 '표현'될 때, 깊숙한 곳에서 억압되어 있던 것이 분출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하나의 '사정' 같다고 생각한다. 오르가슴, 카타르시스.
그로테스크가 트렌드가 되고 있는 요즘, 오르가슴과 카타르시스의 수요가 많아지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단순하게 도파민 중독이 아닌, '억압됨의 분출'이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첫번째 글의 기조를 다시 가져올 수도 있겠다. 자아에 SNS의 영향력이 어느때보다 폭발적인 요즘, 인간은 SNS상에서 다양한 타자를 보며 자신과 비교하고 구분한다. 외부와 자아의 경계가 점점 더 진해지고 자아는 비대해진다. 그럴수록 '고정된 자아' 속의 인간은 스스로를 억압한다. 고정이라는 것에는 원래 울타리가 있으니.
강희조의 그로테스크의 주목에 관한 고찰은 매우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서브컬쳐계 안에서 사람들이 캐릭터 뒤의 성우에 주목하고, 버튜버의 뒷면을 캐려는 이유에 대해 질문한다. 사람들은 캐릭터에 대한 흥미를 넘어 그 뒤편에 존재하는 불확실성을 없애고자 하는 것이라고 언급하는데, 오히려 캐릭터라고 불리는 껍데기에 빠질 수 있는, 즉 껍데기 그 자체를 사랑하는 피그말리온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주목한다.
아마도 캐릭터 뒤에 성우에 주목하는 인간의 부류는
예를 들어 신은 모두 만들어졌다거나, 예술가나 연예인의 인격을 따진다거나 등의 행동도 하지 않을까? 이는 오랫동안 이어진 논쟁이다. 신은 만들어졌는가? 예술가의 인격과 작품은 떼어놓을 수 있는가? 등의 논쟁 말이다. 나같은 경우 전에는 이 부류에 속했었다. 하지만 현재는 이 진실이라는 것과 다른 껍데기, 즉 '환상'이 어째서 만들어지게 되었는가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우리는 이 하이퍼리얼리즘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드는걸까? 이전의 내 글을 읽어주시길 바란다.
https://brunch.co.kr/@esuacn/3
저자(박정서)는 보컬로이드 '하츠네 미쿠'의 사례를 중심으로 하츠네 미쿠를 향유하는 사람들의 '실체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여기는 태도'를 믿음, 소망, 사랑의 세 가지 키워드로 풀어낸다. 실체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여기는 공동의 믿음, 실제로 있고 없음이 중요하지 않다. 어딘가에 하츠네 미쿠가 실존할 것이라는 소망, 보컬로이드에 대한 영속적인 사랑(연한이 없는 공상적인 이해와 수용) ...
나는 저자의 글을 읽고 처음으로 하츠네 미쿠라는 캐릭터를 알았으며, '보컬로이드'라는 존재를 비로소 인식했다. 보컬로이드 ... 인간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일종의 전자 악기라고 한다. 하츠네 미쿠를 좀 더 알아보기 위해 인스타그램에 검색해보았다.
내가 모르던 또 하나의 세계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 이후로 자꾸 알고리즘에 하츠네 미쿠같은 일본 캐릭터?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끙^^;) 하츠네 미쿠의 향유자들은 하츠네 미쿠를 신격화한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는 또 김성민의 글에서 등장한 피그말리온같은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짜인 것을 알면서도 속는다. 그래, 그게 바로 사랑이 아닐까? 연인의 거짓말을 믿어주고 싶은 바보 같은 마음, 그것이 사랑이 아니느냐고. 하츠네 미쿠따위 가짜가 아니느냐고 하는 사람보다야는 이 피그말리온들이 더욱 사랑하고 있는 것 아니느냐고.
"사랑 때문에 하게 된 어리석은 짓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면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셰익스피어, <뜻대로 하세요As You Like It> 2막 4장
이십칠(@27_isibchil)은 pie라는 서울의 전시공간의 운영진이기도 하면서 세카이계라는 큰 테마로 창작한다. 만화와 게임, 애니메이션 속 세카이계라는 장르의 큰 이야기적 흐름인 '기존 세계의 무너짐과 새로운 세계의 시작'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우치다 유이(@_y_u_c_h_i_)는 투명한 소재로 회화를 제작하고, 이 매체는 과거 애니메이션 제작에서 사용되고 있던 셀화의 기술과 구조를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려진 이미지가 갖는 운동성/시간성의 문제와 투명한 지지체의 특성을 이용한 '감상자'와 '지지체 너머'라는 경계선/거리의 문제를 작품의 문제로 삼고 있다고 함.
그 중 우치다 유이의 코스프레에 관한 이야기, 이십칠의 외곽선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마음과 육체 사이에는 항상 '빗나감(discrepancy/dissonance)'이 있고, 그 어긋남이나 흔들림을 안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마음과 육체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드물고, 마치 얇은 막을 여러 층이나 겹친 것 같은, 복수의 레이어를 가진 존재라고도 생각합니다. (...) 이 「빗나감」을 보다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의 하나가 코스프레입니다. 코스프레를 함으로써, 나는 「이렇게 존재하고 싶다」라고 바라는 자신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캐릭터로 말한다면 아야나미 레이가 아니라 아스카가 되고 싶다고 느끼는데요, 아스카가 가진 강인함이나 자기 주장, 어떤 형태의 자유로움에 끌리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단순한 동경이 아니라, 「만약 자신이 이 외피(=육체)로부터 해방되면, 이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하는 생각에 가깝습니다. 즉, 코스프레는 자기 해방의 수단이며, 외곽선(육체나 외모)으로 부터의 일탈, 혹은 해체의 시도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치다 유이, 24쪽
'검은 아웃라인을 통해서 캐릭터와 캐릭터(나와 타인), 캐릭터와 배경(나와 풍경)이 도려낸 듯이 분리되어 버립니다. 그런 점에서 캐릭터의 가장 바깥의 껍데기란 이런 '외곽선'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 그렇게 몸에서 벗어나 영혼의 차원으로 향했을 때, 기존 세계의 견고한 시각적 판단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 그런 영혼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앞에서 말한 캐릭터(인물)을 단단히 옭아 맨 '외곽선'이 사라진 캐릭터의 모습이나, 서서히 몸이 흩어져 최우에는 얼굴만 겨우 인식 가능한 모습으로 남은 이미지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십칠, 26쪽
코스프레는 처음 강현의 글처럼 자아를 잠시라도 수정함으로서 자기 해방의 수단으로 시도된다고 생각한다. 코스프레인들은 자아수정주의? 이십칠은 코스프레가 재미있는 이유가 '누군가 나의 코스프레를 보고 그 캐릭터로 나를 인식해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코스프레장 안에서는 속이고 속아준다. 피그말리온들이 가득해! 그들은 모두 사랑하고 있다. 역시 사랑은 자아를 내려놓는 자만이 할 수 있다.
이십칠의 외곽선이 모두 사라진 캐릭터를 보았을 땐, 왠지 서글픈 마음이 들기도 했다. 시각적 판단들로부터 자유로워진 외곽선의 모습. 어쩌면 자신이 사라진다는 듯한 이미지적 표현때문에. 하지만 반대로 이를 자아를 외부 세계와 융해하기 시작한 모습으로 생각해보면 비로소 이 썩어빠진 세상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그 용기 직전의 소녀로 목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어쩌면 오해받는 것에도 장점이 있다고 생각해본다. 사람들은 나를 내가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오해할 때도 있지만,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오해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모두들 자기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있다. 그것이 아직 자기 자신이 아닌.
한 번 속아보는 건 어떨까? 그 사람을 사랑해보는 것이다. 진짜 모습이 아니라고 비난하기 보다는.
어쩌면 당신도 속여보는 건 어떨까? 당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당신을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서로의 피그말리온이 되어 새로운 서로를 창조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