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rei Tarkovsky의 <희생>
며칠 전에 본 Andrei Tarkovsky의 <희생>에서 받은 메시지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메시지는 점점 더 무게를 가지고 육중해진 엉덩이를 가지기에 이르렀으며, 이 생명체는 내 가슴께까지 내려와 눌러앉고 있다. 영화 거의 첫 장면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기억나는 대로 옮겨본다.
“아들아, 옛날에 어린 수도승이 살고 있었단다. 어린 수도승의 스승은 그에게 죽은 나무를 가져와 심고 매일 물을 주면 꽃이 필거라고 말했지. 그 다음 날 어린 수도승은 바로 죽은 나무를 가져와 심고 매일 같은 시간에 매일 물을 주었단다. 그랬더니 후에 나무에 정말 꽃이 피었단다. 매일 같은 행동을 매일 같은 시간에 일종의 의식처럼 행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거야.”
나는 이 아버지의 대사에서 다름 아닌 의식이라는 단어에 꽂혀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의식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구체적으로는 어린 수도승이 실천에 옮긴 바와 같이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의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무언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어떠한 의식을 치루고 싶다는 욕구는 곧이어 의식을 치루어야만 한다는 필요로 바뀌었다. 사고 싶은 물건을 필요하다고 착각하듯이.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떠올려보았다. 더 나은 곳으로 취업하기, 돈 걱정 없이 살기? 하지만 이러한 욕구는 의식을 위한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내가 더듬어 정의내린 의식의 조건은 이러하다.
1) 그것이 희생일 것 2) 그것이 실현일 것
희생일 것 : 더 나은 곳으로 취업하기, 돈 걱정 없이 살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소망이다. 그러한 것을 이루기 위한 의식은 성립될 수 없다. 의식은 다른 누군가 혹은 다른 무언가를 위한 희생이어야만 한다. 수도승이 죽은 나무를 위해 자기의 시간과 노력을 희생하였듯이, 주인공 알렉산더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집을 불태웠듯이, 의식은 자신이 아닌 무언가를 위해 치러져야 한다.
실현일 것 : 죽은 나무를 심어다 계속 물을 준다고 정말로 꽃이 핀다고 믿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하지만 수도승은 보장되지 않은 결과와 헛수고가 될 수 있는 노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을까? 그저 초연한 것일 것 같다.) 매일 같은 양의 작은 믿음과 소망만을 가지고, 매일 같은 시각에 물을 준다. 그 소망에의 맹목적 믿음이 정말 아름다웠다. 하지만 곧이어 또한 믿음만 가지고는 그것이 의식이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어린 수도승은 그저 스승의 말을 믿고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로구나' 하고 끝냈을 수도 있었고, 알렉산더는 '세상을 꼭 구원해주세요 주님'하고 기도로 그 실천을 끝냈을 수도 있다. 둘 다 굳게 믿는 것은 가능한 상태이다. 하지만 수도승은 직접 죽은 나무를 가져다 심었고 알렉산더는 자기 집을 제물로 바쳤다. 이렇게 의식은 실현이어야만 한다. 나또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매일 같은 시각에 어떤 의식을 실현해보려 계획 중이다. 나는 해야만 한다고 느낀다. 가장 좋은 시각과 방법을 모색 중이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인물의 운명을 바꿀 수 없음을 안다는 것이다. 보바리 부인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보바리 부인은 자살했다>라는 주장이 반박 불가능한 진리의 모델이라는 위안 어린 확신을 더이상 갖지 못할 것이다. 소설의 가능한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영원히,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우리의 욕망이 닿지 않게, 일은 다 일어났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이 좌절을 받아들이고 그로써 숙명에 전율해야 한다. 나는 이 <운명fatum>에 대한 교육이 문학의 주요 기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교육이 허구 속의 인물들, 속세의 성인들과 신자들의 성인들이 지닌 패러다임적인 가치다. (Umberto Eco <에코의 위대한 강연>, 이세진 옮김, 열린책들)
내 마음을 떠나지 않고 있는 움베르토의 문구이다. 우리는 오로지 일어난 일은 다 일어난 문학 안에서만 진리를 구할 수 있다. 그것은 문학만이 '하이퍼리얼리즘' 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보바리 부인은 존재하는가? 에 대한 질문에는 두 가지 대답이 나올 수 있다. 물질세계에 사는 인간은 보바리 부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할 것이고 비물질세계에 사는 인간은 보바리 부인은 존재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비존재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도 이야기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보바리 부인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너는 왜 예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왔던가?’ 갑자기 또 다른 내가 말했다. 보바리 부인이 존재하는 것처럼, 예수 또한 존재한다. 왜 이 생각을 하기까지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친구의 얼굴을 보고 예수란 없다고 차갑게 말하던 내 입술을 상상하자니 참혹하다. 보바리 부인과 예수는 물질 세계를 넘어 존재하는 - 리얼보다 더 리얼한 - 리얼보다 더 위에 있는 - 하이퍼리얼이다. 그렇다면 -
우리는 이 하이퍼리얼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드는걸까?
보바리 부인과 예수는 어째서 존재하게 되었는가?
고대부터 인간들은 왜 하이퍼리얼의 존재를 만들어 냈는가?
우리가 하이퍼리얼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물질의 세계에서는 사랑도 호르몬의 작용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박탈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군다나 현재 인간 사회의 군상에서도 - 애석하겠지만 승자는 없는 - 세상엔 아름답지 않은사건들만 알려지고 있다고 - 내 맘엔 그런 빌어먹을 바이러스들이 - 잠시 ... 현실의 즉각적 만족을 미루는 능력, 즉 성실을 미련이라고 읽는 현대인들에게 공동체를 위한 희생은 개인의 한 번뿐인 인생의 순간을 빼앗는 고루한 미련함으로 취급될 뿐이다. 사랑에는 자기 희생이 필요하다. 사랑은 단연코 타자를 위한 것이다.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남을 지킬 수 있다 - 가 아니라, 남을 지킬 수 있어야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법이다. 우리에게 사랑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는 바이러스가 내 맘을 잠식했을 때 즈음 - “우리는 살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사는 겁니다.” 감히 나는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는 것을 ... 감히 사랑을 하고 말고를 논했다는 것을 ... 그 동안 내가 저지른 신성 모독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사랑은 우리의 구조이며 우리는 그 구조로 기능할 수 있는 것.
볼드윈 효과 Baldwin effect. 학습된 행동이 유전형질로 자리 잡는 것. 사랑은 우리 DNA에 박혀 있으며 이 신성은 하이퍼리얼을 통해 지켜진다. 인과관계를 바로 잡은 돌연변이들로부터 .. 우리는 우리가 사랑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다음 세대에도 학습시켜야 한다.
이것은 하나의 희생이자 제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