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 형 (1)

사촌형 방에는 만화책이 가득했다.

by 정서윤

사촌형 방에는 만화책이 가득했다.

마지막으로 간 것이 중학생 때라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연속물 시리즈 중 항상 1권을 뽑아들고 형 옆에 앉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난 항상 1권만 읽었다. 이모네 집에 너무나 가끔 가서, 항상 내용을 까먹었기 때문이다. 어쩔 땐 똑같은 책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도 헷갈렸다. 어쨌든 이모네 집에 가면 괜히 멋쩍었고 나 스스로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느껴져 항상 형의 방 안쪽 구석에 들어가서 만화책을 들고 시간을 보낸 기억이 난다.

형이랑은 그렇게 친하지 않았지만 난 왠지 변죽이 좋은 놈이었기에 으레 껏 항상 이모네에 갈 때면 형 방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것은 내 나름대로의 친밀함의 표시였고 형도 그것이 싫지 않은 눈치였다. 이모가 항상 '쟤는 만화책을 저렇게 소중하게 모은다'며 핀잔을 주었지만 그 소중한 만화책 중 내가 무슨 만화책을 집던지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꽂이에 다 꽂지 못해 바닥에 쌓여있던 만화책을 내가 밑에서부터 뒤적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쩔 때는 '그건 7권을 친구가 빌려가서 없어.'라고 알려주기도 했다. 나에게 7권까지 읽을 시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형에게는 친구가 없어보였는데, 어쨌든 책장을 둘러볼 때 항상 몇 권이 비어있는 것을 보면 몇 명은 있었던 모양이다. 언젠가 더 거슬러 올라가서, 형이 중학생, 내가 초등학생 때였다.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내 동생과 내가 형에게 하루 동안 맡겨졌다.

형은 그 때 우리를 근처 비디오가게로 데려갔다. 이름은 <피카츄 비디오> 였는데, 그곳엘 가면 비디오뿐만 아니라 만화책도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만화책을 보고 어렵다고 느꼈던 것을 떠올리면 만화책 매니아들이 가는 가게인 것 같다. 지금은 없어졌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엄마가 우리 형제를 만화방에 데려간 적은 없었고, 그래서 그 진기한 곳을 휘둥그레한 눈으로 구경하는 것으로 우리 형제는 충분히 재미있어했다.

읽을 만한 만화책이 없어서 자리를 잡아 이미 만화책을 읽고 있던 형 옆에 어슬렁댔다.

형은 그런 우리가 신경 쓰였는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비디오 하나를 빌려서 우리를 데리고 나왔다. 그 비디오는 명탐정 코난의 극장판이었다. 어찌됐든 형이 우리 수준에 맞춰 애써 고른 비디오이리라. 난 말없는 형이 내심 좋았다. 형은 말 없이 표정 없이 항상 우리의 뒤를 봐주었다. 우리가 말을 안 들을 때면 무겁게 "빨리 와." 하는 한 마디, 그 정도 말뿐이었다. 어려서부터 종알대던 나에게 이모네 집에 놀러갈 때마다 형은 잠시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 형이 문득 생각날 때면 짐짓 표정을 없애고 무뚝뚝하게 굴어보기도 했다. 형은 집에 항상 혼자 있다. 이모부는 집을 나갔고, 이모는 밤에 돌아온다.

엄만 형이 불쌍하다며 혀를 끌끌 찼지만 나는 형이 불쌍하지 않았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어쩌면 형이 너무 의젓해서, 너무나 의젓해서 불쌍함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고 느꼈다. 그러고나서 2년 후 쯤인가, 가을 밤 길거리에서 형을 마주쳤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