앱에서만 중급
출국 전에 어학원 수업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등록도 했고, 오리엔테이션 메일도 받았다. '여권과 간단한 필기구를 지참하고 9시까지 안내 데스크로 오세요'. 그래, 오늘이 드디어 그날이다. 아침을 간단하게 챙겨 먹고, 단정해 보이는 옷으로 골라 입었다. 거울 앞에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긴장하지 마. 이 나이에 무서울 게 뭐 있냐. 그냥 여행 온 거야.”
8시 40분쯤 도착했는데 어학원 안내 데스크는 이미 사람들로 붐볐다. 간단한 절차를 마치고 교실로 안내를 받았다. 의자에 앉으니 그제야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십 대 혹은 이십대로 보이는 젊은이들 사이로 중년여성들 몇 명도 눈에 띄었다. '나이 든 사람이 나만은 아니군'. 앞자리에는 다소 어려 보이는 여자 아이가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그도 나처럼 살짝 긴장한 듯 보였다. 연장자답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전 세계 공식적인 첫 질문.
“Where are you from? I’m from Korea.”
“I’m from Japan! I'm a student”
"University?"
"No, high school"
“Are you here alone?”
“Yes!”
"わあ、すごいですね!"
'아, 스고이데스네... 라니'. 정말 주책이다. 영어 배우러 와서 일본어가 웬 말이냐. 일본어를 뽐내고 싶었던 거야? 아니면 아는 영어를 다 말해 버려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던 거야? 갑자기 일본어를 내뱉자 앞에 앉은 하이스쿨 스튜던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 짧은 일본어가 흥미를 끌었는지, 조금 떨어져 앉아있던 중년의 여성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자기도 일본에서 왔다고 먼저 말을 건넸다. 자신을 '요코'라고 소개한 여성은 휴가를 이용해서 일주일 간 공부를 하러 왔다고 했다. 자기는 오사카에서 왔는데 한국에 꼭 가고 싶다고 하면서, K-드라마를 좋아한다고 했다(일본 여성들의 K-드라마에 대한 애정은 정말 역사가 깊고 깊구나). 요코의 영어는 꽤 유창했다. 막힘없이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했고, 내가 버벅대도 센스 있게 잘 알아들었다. 직장 여성이라면 휴가 기간에는 쉬고 싶었을 텐데, 비행기를 타고 공부하러 올 정도면 진취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국적 불문, 열심히 사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짧은 영어로 할 수 있는 대화가 바닥나 분위기가 슬슬 어색해질 무렵, 어학원 스태프가 테스트 용지를 들고 나타났다. 어휘, 문법, 독해 그리고 에세이 실력을 고르게 평가하는 시험지였다. 스고이한 일본의 하이스쿨 스튜던트와 진취적인 요코가 답안지를 술술 채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시험지를 얼마 만에 받아본 거야? 수능 영어라도 풀고 올 걸 그랬나?' 시험을 본다는 것 자체가 낯설었다. 그래도 아는 것은 채우고 모르는 것도 대충 어림짐작으로 채웠다. 모르는 문제가 있어도 빈칸으로 두지 않는 것이 시험에 임하는 나의 오래된 태도이다.
이어진 회화 테스트에서 처음 보는 면접관은 나에 대해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다. 면접관은 내가 의자에 앉자마자 짧은 인사를 건넨 뒤 질문을 퍼부어댔다. '아, 당신은 나에 대해서 뭐가 그리 궁금한 것이 많으신가요? 천천히 합시다!'
“영어를 공부하러 온 목적이 뭐예요?”
".... 아 음. 그러니까 그게... 여행하려고"
더 깊고 철학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속 깊은 이야기를 영어로 표현할 길이 없어서 그냥 아는 단어를 조합해서 말했다. 결국은 to travel.
“그동안 어떤 방법으로 영어 공부를 하셨어요?”
역시 '아...'와 '음...'을 반복하다가 눈을 껌뻑거리고 어버버 하다가 냅다 뱉었다.
“앱! 앱으로 공부했어. 아, 그 있잖아 왜. 영어공부하는 앱! 너 알아?”
면접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이 되는 한편, 속으로 애꿎은 영어 앱에게 투덜거렸다.
'넌 나에게 거짓말을 했어! 매일 잘한다고 그랬는데, 이게 뭐야? 말을 못 하겠잖아!'
다른 질문에도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 보려 했지만, 머릿속에서 맴도는 말이 쉽게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 나의 영어 실력이 정말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영어 앱으로 그렇게 신나게 공부를 했건만, 실전은 정말 다르다. 살짝 자괴감이 들려던 찰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고 마구 떠들어댔다. 그랬더니 오히려 입이 조금 열렸다. 그래 이러면 되는 거지 뭐. 비문이든 조각말이든, 어쨌든 말은 말이니까. 그렇게 인터뷰를 마치고 나자 면접관은 1부터 5까지 나의 영어 실력을 스스로 정해보라고 했다.
"네가 정해. 나는 못하겠어!"
그러나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한번 내가 생각하는 나의 실력을 번호로 정하라고 했다. 나는 망설이다가 2에 체크를 했다. 뭐라고? 나의 자존감이 이렇게 낮다고? 2라니, 그건 아니잖아. 4에 체크를 할 걸 그랬나? 아니지 무난하게 3에 체크를 할 걸 그랬어. 그러나 이미 늦었다. 테스트 결과, 나는 'Elementary'에 배정되었다. 충격! 역시 2에 체크하는 것이 아니었어. 앱에서 나는 중급이었다고! 항상 'Great!'라고 말해주던 앱 속의 튜터가 떠올랐다.
오전에 테스트를 마치고 오후부터 수업에 들어갔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선생은 말이 빨랐고, 학생들은 대답이 빨랐다. 게임도 하고 팀플레이도 하는데, 다들 열정이 넘쳤다. 나는 살짝 얼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들이 지나갔다.
'이 상태로 두 달을 어떻게 버티지?'
'이럴 거면 한국에서 영어 카페나 다닐 걸 그랬나 봐.'
'먹는 것도 시원찮은데 여기서 어린애들이랑 버벅거리며 뭘 배우겠다는 거지?'
'미치겠다 정말, 비행기표를 바꿀까?'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니야, 아니야 정신을 차리자. 그래도 여기까지 왔잖아.'
'앱이 비록 거짓말을 했어도, 지금 나는 여기에 있잖아.'
현실이 앱보다 힘들다는 걸 몸으로 배운 첫날은 그렇게 혼란과 당황 속에 지나갔다. 오늘은 일단 버텼고, 내일은 오늘보다 한 마디라도 더 해보자고 나를 다독였다. 잘못된 발음과 문장에 신경 쓰지 말자. 그렇게 위안했다. 영어 실력보다 중요한 건,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오늘은 첫날이지 않은가. 시작이 반이라 했으니, 반은 했다. 이제 반 남았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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