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토 발음? 그게 뭔데!

나의 영어는 콩글리시

by 시원

이틀째 되는 날부터 본격적으로 메인 클래스에 들어갔다. 그런데, 출석 체크를 하는데 내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질문을 하는 데 용기가 필요했다.

"익스큐즈미 써, 내 이름을 부르셨나요? 못 들었어요."

'써'는 유감스럽게도 내 이름이 명단에 없다고 했다.

그러더니 내 테스트 결과표를 확인하고는, 나를 Elementary 반으로 안내했다.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눈을 찡긋 했는데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긴장되고 굳어있던 마음이 그 사소한 몸짓에 조금 누그러졌다. 내가 잘못 들어간 곳은 중급반이었다. 그렇게 중급반에 들어가고 싶었던 거야?




Elementary 반의 Main program은 카밀라가 진행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젊은 여성인데 야무져 보였다. 첫 수업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기도 하고, 너무 많기도 하다. 나는 카밀라의 말을 하나도 못 알아 들었다. 좌절의 연속이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수업을 마치고 카밀라가 불렀다.


"어때? 이 수업이 너한테 적당한 수준이라고 생각해? 아니면 너무 높거나 낮아?"

"......."

"이 수업이 너에게 맞지 않다면 너는 다른 수업을 선택할 수 있어."

나는 머릿속에 맴도는 단어들을 마구잡이로 집어던졌다.

"오늘이 첫날... 잘 모르겠어. 이번 주까지... 수업을 들어보고 결정할게. 금요일에... 시험을 본다고 했잖아. 그 이후에 결정할게."

이렇게 알아듣게 말을 한 것은 아니고 대충 단어만 나열했는데 놀랍게도 카밀라는 알아들었다.

"O.K. 좋아, 내일은 다른 교실로 가지 말고 여기로 잘 찾아와."

"응 그럴게. 고마워"


하루 만에 반을 바꿀 수는 없었다. 나에게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결정을 미룬 건 잘한 것이었다. 다음 날부터는 카밀라의 말이 띄엄띄엄 들리기 시작했다.





카밀라의 수업은 Main program으로 오전에 진행된다. 오후에는 Special Focus Module class에서 또 다른 수강생들과 함께 수업을 듣는다. 이 수업은 앤디가 진행하는데 매우 유쾌한 기질을 가진 말레이시아 남성이다. 연극배우 같은 몸짓을 하고, 목소리 톤을 상황에 따라 바꿔가며 수강생들을 지루하지 않게 한다. 영화와 음악을 수업 아이템으로 자주 활용하는데 그 분야에 조예가 깊어 보였다. 그의 취향이 마음에 들고, 수업도 재미있어서 열심히 참여하는데, 문제는 그의 발음이 나에게 낯설다는 것. 앱의 미국식 발음으로 영어 공부를 하다 보니, '아시안 잉글리시'에 귀가 잘 안 열렸다.




어학원에는 일본,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인도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골고루 섞여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영어 발음도 제각각이다. 일본인은 일본식 영어를 하고, 중국인은 중국식 영어를 하고, 사우디에서 온 친구는 사우디식의 영어를 한다. 나 역시 한국식 영어를 하겠지. 카밀라의 말에도 남미 특유의 발음이 살짝 섞여있다. 카밀라와 앤디는 이렇듯 다양한 영어를 구사하는(그것도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과 대화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어 보였다. 어학원에 오래 다닌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제각각 독특한 발음과 억양으로 말하며 웃고 떠든다. 나는 매일, 각자의 모국어 위에 영어를 얹어 쓰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깨닫는다. '네이티브 스피커'나 소위 '본토 발음'이 편견에 가득찬 말이었다는 것을. 마침 오늘 카밀라의 수업 주제는 formal message와 informal message에 관한 것이었다. 목적에 맞는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면 발음은 그렇게 문제 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매일매일 다양한 발음과 독특한 억양으로 말하는 '다국적 영어'를 들으며 발음에 대한 편견과 고집도 풀렸다. 이곳으로 어학연수를 가겠다고 결정했을 때 발음에 대한 걱정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영국이나 미국이 아닌 아시아권에서 영어를 배운다고? 발음이 괜찮을까? 아시아의 영어는 고급스럽지 않잖아. 영국식 영어나 미국식 영어를 해야 하는데 말이야.'


그러나 매일 여러나라에서 온 아시아 친구들과 중동에서 온 여러 국적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알게 된 것은 생각을 교류하고 마음을 나누는 데에 발음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발음이 아니라,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이다. 지금은 다양한 발음을 이해하는 능력이야말로 진짜 영어 실력이라고 믿는다.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다국적 발음을 구별해 낼 귀를 갖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도 곧 익숙해질 거라 믿는다. 애초에 영어는 나에게 의사소통의 도구일 뿐이었으니 꼭 미국식이나 영국식 영어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하루의 시작을 엉뚱한 교실에서 시작한 덕일까. 나이가 들어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또한 있다는 것이 반갑다. 이런 변화들이 좋다.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니까 말이다. 내일은 또 나에게 어떤 변화가 생길 것인가.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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