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진짜 시작이네
여름방학 기간이라 어학원에는 학생들이 많았다. 국적은 달라도 젊은이들은 금방 친해졌다.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함께 점심을 먹고, 쇼핑도 나갔다. 나와 같은 날 등록한 학생들도 꽤 있었지만, 그들은 좀처럼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은근히 나를 외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자격지심일 거다. 그래도 뭐랄까, 살짝 소외감이 느껴졌다.
'내가 첫날부터 교실도 잘못 찾고, 말도 못 알아듣고, 허튼짓도 많이 하긴 했다. 그래도 얘들아 클래스메이트인데 우리 잘 지내보자'
속으로 애원하고 투덜거리다가, 이내 스스로를 다독였다.
'나이 들어 젊은애들 사이에서 내가 참 고생이 많다.'
솔직히 말해, 내가 저 애들이라도 또래가 좋지, 나처럼 나이 든 사람이 반가울까. 그래서 나는 Hi! Good morning! / Good bye! 정도의 인사에 웃음을 얹는 걸로 만족했다. 걔네도 웃으며 인사는 잘했다
시간이 흐르자 수업의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여전히 카밀라와 앤디의 말이 온전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단비처럼 귀에 꽂히는 몇 개의 단어로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다. 듣기가 안될 뿐 수업 내용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말했잖은가. 여기는 Elementary반이다. 수업에 적응이 되면서 말하는 횟수도 늘었다.
퀴즈 시간에는 곧잘 정답을 말하기도 했다. 앤디는 게임을 통해 은근히 수강생간의 경쟁을 부추겨 수업 참여도를 높이는 방법을 쓰곤 했다. 의도를 알면서도 게임을 하다 보면 그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열심히 참여하게 되는데 최고 득점자가 될 때가 많았다. 앤디가 음악을 좋아해서 음악 퀴즈를 자주 내는데, 취향이 나와 얼추 맞았다. 그러니 운이 좀 따른 거다. 아무려나 젊은 애들 사이에서 한 문제라도 더 맞히겠다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모습을 친구들이 봤다면 박장대소했을 것이다. 낄낄거리며 놀려대거나. 어쨌거나 나는 종종 득점왕이 되어서 앤디가 상으로 주는 롤리팝을 받곤 했다.
'얘들아, 봤지? 나 이런 사람이야! 내가 너희들하고 한 반에서 공부한다고 나를 너무 우습게 보면 안 된단다. 내가 이래 봬도 왕년에.... 그만하자'
우쭐대는 기분이 드는 한편, 그런 내가 웃겨서 피식거렸다. 왕년 운운할 것 까지야... 그 기분으로 며칠을 보냈다.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서야 알았다. 젊은 애들이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게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았다는 것을.
나와 같은 날 공부를 시작한 다이애나는 라오스에서 왔다. 첫인상이 똘망했고, 수업 시간 내내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조용한 성격이지만 수업 시간에 발언할 때는 서툰 영어로 또박또박 제 할 말을 하려고 했다. Main Program과 Special Modual Program 모두 나와 같은 반인데, 그녀가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저 조용히 웃고, 조용히 말한다. 내가 퀴즈를 맞히면 옆에서 살짝 웃어주는 정도이다.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먼저 말을 건넨 적은 없다. 속으로 '젊고 예쁜 애는 젊고 예쁜 애들과 놀아야지'라는 노인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팀 활동 끝에, 다이애나가 말했다.
"시원, 너는 참 샤이한 것 같아."
그때 문득 다이애나도 내가 먼저 말을 건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애들이 나이 많은 나를 피하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나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뭐라고 이렇게 의기소침해 있는가 싶었다. 다이애나의 말에 힘입어(?) 나는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피곤해하는 하사나에게는 '어제 잠을 잘 못 잤어?'라고 먼저 말을 건네고, 나와 퀴즈왕을 겨루는 아즈마에게는 '넌 항상 스마트하다'라고 친한 척도 했다.
젊은 친구의 한 마디로 내가 이렇게 변하기도 하는구나. 새삼 다이애나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다이애나에게 밥을 같이 먹자고 해볼까? 아니야, 괜히 걔를 귀찮게 할 필요는 없어. 아니지, 걔도 라오스에서 혼자 와서 친구가 없을 텐데. 외로울 거야. 밥 먹자고 했는데 다른 약속이 있다고 하면 어쩌지?'
'밥 먹자!' 이 간단한 말이 이렇게 힘들다. 속으로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왜 이렇게 소심해진 거야! 생각 그만! 행동 개시! 아침에 먼저 와있는 다이애나에게 말했다.
“굿모닝, 다이애나”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와서 조금 놀랐다. 다이애나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굿모닝, 시원”
그 짧은 한 마디와 웃음에 마음이 밝아졌다.
"오늘 점심 같이 먹을래?"
"좋아!"
다이애나는 나의 제안을 반가워했다. 이렇게 쉬운걸. 우리는 점심 메뉴와 식당에 대해 이야기를 더 나눴다. 카밀라가 명랑한 음성으로 아침 인사를 하며 들어왔고, 나는 교재를 펼치며 중얼거렸다.
‘이제 진짜 시작이네.’
이곳에서의 경험은 나를 가두고 있는 틀을 깨는 데도 도움이 된다. 선생은 도처에 있다. 땡큐, 다이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