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과 거짓, 그리고...
어학원 커리큘럼은 문법(grammar), 어휘(vocabulary enrichment), 듣기와 말하기(listening & speaking), 읽고 쓰기(reading & writing)가 균형 있게 배치되어 있다. 한국식 영어 교육 덕에 문법은 반에서 상위권이고, 읽기에도 불편함이 없다(기억하라! 여기는 Elementray 반이다!). 그런데 시험을 보면 꼭 틀리는 문제가 있다. 제시문의 내용과 일치하면 참(True), 다르면 거짓(False)을 고르는 문제다.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이 유형에 반드시 등장하는 'Not Given'이다. 'Not Given'은 제시문에 언급되지 않은 내용을 고르는 문제이다. 공인어학시험에 이런 유형의 문제가 있다는데 처음 경험하는 문제이다. 나는 이 문제가 어렵다.
왜냐? 학교에서 줄곧 풀어 온 문제는 모두 O 아니면 X였기 때문이다. 지문에 없으면 없는 걸로 인정하면 된다. 그런데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그동안 내가 받아온 교육은 맞든 지 틀리든지 둘 중 하나였다. 그러니 제시문에 없는 내용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기반해서 습관적으로 추측하거나 상식에 기대어 '참'이나 '거짓'으로 만들었다. Not Given은 그런 습성을 지적하고 억지로 True/False를 양자택일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제시문에 없는 내용은 그냥 '몰라' 혹은 '알 수 없어'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문제를 풀다 보면, 머릿속에서 자꾸만 '이건 참이야', '아니야, 이건 거짓이지' 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지문에 없는 것을 없는 그저 Not Given으로 두는 것이 의외로 어렵다. 시험 문제를 넘어, 나의 사고방식을 흔드는 훈련 같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단순히 영어 시험 문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생활 속에서도 나는 종종 존재하지 않는 답을 억지로 찾으려 할 때가 있다. 누군가의 말 속에 숨은 뜻을 굳이 읽어내려 하거나 어떤 행동 하나에 '좋다/싫다'의 의미를 붙이려고 한다. 아무 뜻도 없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사실은 ‘Not Given’인데 억지로 True나 False로 바꾸려고 하는 셈이다. 다들 그런 경험이 있지 않나? 누군가에게 인사를 했는데 반응이 없을 때 ‘기분이 안 좋나?’ 혹은 ‘나를 싫어하나?’ 하고 혼자 상상했던 경험들. 누군가 의미없이 한 행동을 두고 온갖 상상을 할 때도 있다. ‘Not Given’으로 두면 될 것을 말이다. 억지 해석을 멈추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러니 이 문제는 나에게 새로운 공부 거리를 제공한다. 세상 모든 일이 '이것 아니면 저것', 'O나 X'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 없는 것을 없는 채로 받아들이는 것도 정답이라는 것을 이곳에서 배운다. 이 문제, 이제 틀리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