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업이 되면 뭐 하나

듣기는 starter

by 시원

어학원 공부는 의외로 빡빡하다. main program을 9시 30분부터 12시 45분까지 진행한다. 중간에 딱 한 번 쉬는 시간이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선생들이 시간을 철저하게 지키는데, 카밀라는 특히 엄격하다. 15분 이상 늦으면 문을 잠가버린다. 지각은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학원 학생들은 종종 늦는다. 지각한 학생이 창밖에서 손짓을 하면 카밀라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한다.


"너무 늦었어. 다음 시간부터 들어올 수 있어. 두 번째 시간에 보자"


학생은 어깨를 으쓱하고 사라졌다가 두 번째 시간에 돌아온다. 선생도 학생도 이런 상황에 불만이 없고, 감정도 상하지 않는다. 아주 쿨하다.




다양한 국적을 가진 학생들의 행태는 제각각인데, 공통점이 하나 있다. 모두 시험에 진지하다. 어학원에서는 금요일마다 한 주간 배운 내용을 점검하는 시험을 보는데, 이때만큼은 모든 학생들이 심각해진다. 사우디에서 온 미미는 수업에 자주 빠지고 장난도 심하지만 시험만큼은 빼먹지 않는다. 시험이 끝나면 학생들이 서로 답안지를 바꿔서 채점하는 peer-check를 하는데, 어느 날인가 내가 미미의 시험지를 채점했다. 점수는 예상대로 높지 않았다. 그래도 미미는 채점이 진행되는 중간중간 계속 자신의 점수를 확인했다.


"나 몇 점이야? 그 문제 맞았어? 너 정확하게 하고 있는 거지?"

"걱정 마, 정확하게 하고 있어."


채점이 끝날 때마다 점수를 물어보는 모습이 꼭 한국 학생 같았다. 미미는 애매한 답을 정답으로 해달라고 카밀라에게 시험지를 들고 가서 애걸을 하기도 한다. 규칙에 언제나 단호한 카밀라. '미미야, 사람을 봐가면서 졸라야지. 카밀라에게는 안 통해.'





매주 치르는 시험 말고도 2주에 한 번꼴로 진급시험 같은 걸 본다. 나는 어학원에 온 지 2주 만에 진급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시험 결과, 나는 Pre-intermediate로 가게 되었다.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여전히 듣기가 안 되기 때문이었다. 조심스럽게 카밀라에게 말했다.


"카밀라, 나는 문법과 어휘가 어렵지는 않아. 에세이 쓰는 것도 좋아. 그런데 나는 '듣기'가 너무 힘들어. 이대로 Pre- intermediate반에 가도 괜찮을까?"

"너는 매우 우수한 학생이야"


기가 막히게 이런 칭찬은 귀에 쏙 박힌다(듣기가 영 안 되는 건 아니다). 카밀라가 늘 그렇듯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나머지 말은 단어를 짐작해 가며 이해했다. 듣기는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니, 다양한 수업을 접해보는 게 도움이 될 거라는 뜻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상급반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내가 2 레벨에 체크를 했지만 진짜 초급은 아니라고. 2주 했으면 됐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 가자! 카밀라에게 진심을 담아 인사를 했다.


"너는 정말 좋은 선생님이야. 고마워"


카밀라가 환하게 웃었다.




Pre-intermediate 반은 말레이시아 출신의 리엔이 수업을 진행했다. 그녀는 늘 웃는 얼굴이었고, 말도 빠르지 않아 수업을 따라가기가 수월했다. Elementary 때보다 수업이 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학원 생활에 적응이 돼서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말했듯이 어학원의 수업은 1주일에 문법, 어휘, 듣기와 말하기, 읽고 쓰기 등이 고르게 안배된 커리큘럼을 갖고 있다. 이 중 학생들은 문법 수업을 가장 어려워한다. 나는 반대로 문법이 가장 쉬웠다. 굳이 순서를 매긴다면 문법-어휘-에세이-말하기-듣기 순이다. 여기에 있는 학생들과는 정반대의 순서이다. 한국의 영어 문법 수업은 단연 최고. 오죽하면 다이애나가 그런 질문을 했겠나.


"너는 졸업한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문법을 기억하니?"

"학교 다닐 때 엄청 외워서 그래."


문법만으로 치면 여기서는 고급반에 들어가도 될만한 수준이다(가끔 이렇게 위안도 해야지). 그러나 말이, 말이 들리지를 않는다. 문제는 '듣기'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야 말을 할 텐데, 알아듣지를 못하니 말도 못 하고... 문법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문법은 어학원의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내가 체면을 구기지 않을 정도의 포지션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될 뿐이다. 그나마도 한 달이 지나니, 그들의 존경 어린 눈빛이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시원은 시험 또 잘 봤네.'

'쟤는 언제나 시험 잘 봐. 그런데 말을 잘 안 해.'


나도 말을 하고 싶단다. 이 친구들아. 너희들이랑 웃고 떠들고 싶다고! 그러니까 천천히 말해줘. 아, 쟤들처럼 순서가 바뀌었으면 좋겠다. 듣기-말하기-에세이-어휘-문법 순으로. 단어 몇 개 가지고 쟤들은 뭔 말을 저렇게 오래 하는 걸까. 어휘력은 내가 훨씬 좋은데. 뭐가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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