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칠 때도 있지
평생 몸에 밴 모범생 기질이 어디 가겠나. 나는 대체로 성실하게 어학원 생활을 하고 있다. 젊은 친구들과 똑같이 수업을 듣지만 그들처럼 수업을 빼먹지는 않는다. 선생의 설명을 알아듣지 못해서 엉뚱한 짓을 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한 번 창피한 일을 겪을 때마다 하나씩 더 배운다'는 정신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래도 문득문득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들을 데리고 한 달 예정으로 머물렀던 요시이가 떠났다. 피차 영어가 짧아서 긴한 얘기를 주고받을 수도 없었고, 둘 다 내성적인 인간들인지라 같이 뭘 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요시이가 떠나는 게 섭섭했다. 떠나기 며칠 전부터 '네가 떠나면 나는 외로울 거야. 이제 스펠링을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니?'라고 아쉬운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요시이는 그런 내 마음을 고마워했다. 떠나는 날, 마지막 인사를 건네자 요시이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정갈하게 포장된 쿠기 상자와 즉석 미소된장을 가지고 왔다. '나는 너에게 줄 것이 없는데...'라고 말하자 '괜찮다'를 연발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고마웠다고 말하면서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감쌌다. 짧은 만남에 비하면 꽤 진한 헤어짐이었다. 사람이 오고 가는 것에 영향을 받는 스타일이 아닌데도 요시이가 떠난 후 며칠간은 마음이 허전했다. 재미가 붙었던 어학원 생활도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즈음에 새로운 선생을 만났다. Pre-intermediate반으로 올라가면서 오후에 진행하는 Special Focus Module class의 반도 바뀌었다. 이 반은 어학원에서 학생들이 기피하는 레이철이 수업을 진행했다. 레이철에게는 여러나라에서 온 제각각의 학생들을 '휘어잡는' 뭔가가 있었다. 그녀의 수업에서는 한 눈을 팔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말도 빠르고 몸짓도 과장된 레이철에게 잔소리 폭격을 맞기 때문이다. 그대신 성실하게 수업에 임하는 학생들에게는 과도한 친절을 베풀기도 한다. 레이철은 말이 빨라서 안 그래도 듣기에 어려움이 있는 나는 그녀의 말을 못 알아들을 때가 많았다. 무슨 말인지 몰라서 눈을 끔뻑거리고 있으면 옆으로 다가와서 온몸을 써가며 천천히 다시 설명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이 가라앉은 날은 그런 친절이 오히려 나를 창피하게 만들기도 했다.
'오, 레이철 그냥 모르는 척 지나가줘. 나 지금 슬럼프야.'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삼키던 바로 그날이었다. 내 순서가 되어서 발표를 하고 있는데 내 말을 듣고 있던 레이철의 눈이 위로 올라갔다.
레이철은 back와 bag을 반복하면서 나에게 따라 하고 했다. 레이철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선생이고, 나는 학생이니까. 그녀를 따라서 back와 bag를 반복했다. 어디선가 킥킥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레이철이 나한테만 그러는 것은 아닌데 그날따라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진짜 back와 bag도 구분 못하는 사람인 줄 아냐? 내가 이래 봬도 한국에서는.... 그만하자.
의욕이 넘칠 때는 레이철의 수업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도전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지금 나는 좀 지쳤다. 레지던스에서 쉬고 싶은 기분을 뒤로하고 어학원에 나왔는데, 그런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당연히!). 그런 날은 계속 기분이 바닥으로 꺼진다. back와 bag을 그렇게 반복시켰어야 했어? 레이철? 좀 살살하면 안 돼? 한 달만 있을걸. 뭣하러 두 달씩이나 등록은 해갖고.... 내가 고생이 많다. 내일 쨀까?
그렇게 마음을 먹고도 수업을 빼먹는 마음이 썩 흔쾌하지만은 않았다. 내가 얼마를 주고 여길 왔는데... 본전 생각도 나고, 오늘 수업을 빼먹으면 내일은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몸에 밴 습성을 거스르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나 나는 결국 그 어려운 일을 했다.
수업을 째고, 아침 일찍 쿠알라룸푸르 도심에 있는 터만 투구에 가서 숲길을 걸었다. 푸른색을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수업을 째고도 결국 하던 짓을 하는구나. 그래도 기분 전환을 했으니 내일은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 싶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가니, 친구들이 어제는 왜 오지 않았느냐, 고 물었다. 그들의 관심이 고마웠다. 누가 말만 걸어줘도 고마워하는 걸 보니, 내가 지치긴 했구나. 살짝 긴장한 상태로 레이철 교실에 들어갔다. 그녀가 흘낏 쳐다보더니 어제 왜 안 왔냐며, 괜찮냐고 물었다. 눈물 날라 그런다 얘.
웃으며 말하고 생각했다. 힘 빼자. 첫날 그랬던 것처럼 그냥 여행 왔다고 생각하자. 그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