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과 하사나
오전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한식이 먹고 싶었다. 수업이 끝나자 마자 된장찌개를 먹어야겠다는 일념으로 후다닥 가방을 싸서 제일 먼저 나왔다. 이런 날은 엘리베이터가 더디게 온다. '살림'과 '하사나'가 어느새 옆에 와 있었다.
"시원, 우리 밥 먹으로 갈건데 같이 갈래?"
누가 먼저 나에게 밥을 먹자고 제안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하필 오늘! 나 된장찌개 먹을라고 했는데...그러나!
"좋아. 뭐 먹으러 가는 건데?"
"우린 뭐든 잘 먹어. 네가 정해"
된장찌개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그들과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런데 그 어려운 메뉴 정하기를 나한테 하라고? 우리 셋은 길거리에 서서 서로에게 메뉴를 결정하라고 떠밀다가 결국은 어학원 앞에 있는 푸드코트로 갔다.
살림은 예멘 출신의 사십대 남성인데 사우디에서 일을 한다. 사십대 같지 않은 귀여운 얼굴에 성격도 유쾌해서 젊은 친구들과 격의없이 잘 어울린다. 그의 영어 실력은 나와 정 반대이다. 쉬운 단어를 쓸때도 스펠링이 다 틀리는데 듣고 말하는 것은 잘한다. 듣기에 약한 나를 배려해서 나와 얘기할 때는 천천히 말하는 세심함을 지녔다. 친척들이 있는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거기서는 직업을 얻을 수가 없어서 사우디에서 일하고 있다.
하사나는 이십대 초반이나 되었으려나. 무리지어 다니는 젊은이들과 달리 혼자 잘 노는 스타일이다. 그래선지 그에게서는 특유의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가끔 수업에 늦는데, 왜 늦었냐고 물어보면 밤새 수영하고 늦게 잤다고 말하는 애다. 함께 공부하다 보면, 얘가 머리가 좋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친구들이 있는데 하사나가 딱 그렇다. 수업시간에 튀지 않으나 뒤쳐지지 않고, 나서지 않으나 존재감이 분명한 사람. 그런 하사나가 마음에 들어서 괜히 먼저 말을 걸기도 한다.
"머리 잘랐구나"
"너무 짧게 잘랐어"
"아냐 잘 어울려! 내 머리보다 길잖아"
"오 시원, 너는 원래 짧았잖아"
이런 애들이 밥을 먹자는데 그깟 된장찌개가 대수랴. 우리는 푸트코트에서 각자 해물볶음밥, 비프볶음밥, 야채볶음밥을 주문했다. 밥을 먹으면서 어학연수생들이 나눌 수 있는 흔한 이야기들을 함께 나눴다. 너 여행 좋아해? 어디어디 가봤어? 어느 나라가 제일 좋더냐? 말레이시아에서는 어디 가봤냐? 이 근처에 맛있는 식당이 있냐? 너 휴대폰 브랜드가 뭐냐? 삼성폰은 너무 비싸더라. 왜 젊은애들은 아이폰을 많이 쓰냐...이런 얘기들. 얘기를 나누면서 살림은 내가 대화에 잘 섞일 수 있도록 눈을 마주치며 천천히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사나는 그건 것은 아랑곳 하지 않았으나, 대화 중간중간 한국에 대한 관심을 적절하게 표현했다.
된장찌개는 못먹었지만 입에 맞지 않은 볶음밥을 그들과 함께 먹는 시간이 좋았다. 밥값은 살림이 지불했다. 내가 나이가 제일 많다고 만류했으나, 살림은 자기가 먹자고 했으니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했다(여기 한국이야?). 나는 커피를 샀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어학원으로 나는 집으로 향했다. 내가 몸이 좋지 않아서 오후 수업은 듣지 못한다고 하자 하사나가 어린애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공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야. 건강이 중요하지. 집에 가서 잘 쉬어. 시원!"
나 이제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왜 진즉에 이런 시간을 더 많이 갖지 못했을까. 철학적인 대화가 아니더라도, 하등 쓸데없는 이야기로도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데 말이다. 말은 안해서 안통하는 것이지, 일단 하기 시작하면 통한다. 나의 어눌한 표현이 그들에게 얼마나 가닿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수업시간에 막혀있던 귀가 이상하게 그들과 이야기할 때는 열렸다. 물론 놓친 이야기도 있었겠으나, 그날의 대화가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좋았다.
'어학원에서의 공부가 뭐가 중요하냐, 이렇게 아무 특별한 것 없는 시간을 더 많이 보냈어야지.'
일주일을 남겨두고 깨닫는다. 깨달음은 언제나 늦게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