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해도 충분히 성실해요

아, 성실한 한국사람

by 시원

보영씨가 이것저것 질문을 퍼붇기 시작했는데 나는 자꾸 웃음이 났다. 한참 말을 이어가던 보영씨가 '왜 그러세요?' 하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질문이 벌써 너무 한국 사람이에요."

"네?"

보영 씨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낯선 도시에서 혼자 지내는 일이 적잖이 긴장되었는지 한동안 몸이 좋지 않았다(Dairy in KL 03화 이곳에 좋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네). 병원에 다니느라 어학원에 결석하는 날이 잦았고, 힘든 몸을 이끌고 어학원에 간 날도 오전 수업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쉬었다. 그러느라 어학원에 보영씨가 온 것을 한참 지나고서야 알았다. 보영씨는 보영씨대로 나이 든 한국인 학생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교실을 기웃거렸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보영씨를 만난 것은 어학원에 마지막으로 등교한 날이었다. 레이철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들어간 교실에 보영씨가 있었다.




어학원에는 일본인이 가장 많고, 사우디나 인근 아랍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그다음으로 많았다. 어학원에는 한국인들이 몇 명 있었으나 내가 어학원 생활을 시작한 뒤 일주일 간격으로 모두 떠나버렸다. 처음 어학원 생활을 시작할 때 뭐가 뭔지 몰라 우왕좌왕할 때 한국에서 온 유미씨에게 이것저것 도움을 받았다. 유미씨는 졸업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어학연수를 온 이십 대 여성인데, 이곳에서의 생활을 갭이어라고 생각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어학원 생활을 마치고 유미씨가 한동안 여행을 하고 싶다며 떠나자 어학원에 한국인은 나 혼자였다.


보영씨도 나처럼 어학원 생활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다. 처음의 내 모습이 생각났다. 유미씨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금과옥조 같았는지 모른다. 점심을 먹으러 간 식당에 앉자마자 보영씨는 봇물처럼 말을 쏟아냈다.


"아, 고작 일주일 한국말을 못 했을 뿐인데, 한국말을 하니까 살 것 같아요!"

"진작 만날 것 그랬어요.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 결석이 잦았어요."

"그러게 말이에요. 아쉬워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다행이네요. 시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저는 용기를 얻었어요. 저보다 나이도 훨씬 많은 분도 혼자서 잘해나가고 계시는데... 하면서 말이에요. 한국에 있는 친구들한테 벌써 시원님 얘기를 했어요. 우리도 늦지 않았다고요. 어머! 죄송해요. 제 말씀은 존경스럽다는 그런 의미예요."

"아... 예. 제가 뭐, 존경받을만한 사람은 아니고..."

"아니에요. 저 떠나올 때 친구들이 나이 들어서 뭔 어학연수냐고, 막 그랬거든요."


내가 어학연수를 가겠다고 하자 주변에서 보인 반응이 생각나서 나는 좀 웃었다. 사십 대 중반인 보영씨는 회사를 그만두고 세 달 일정으로 어학연수를 왔다고 했다. 털털해 보이는가 하면, 무척 진취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신이 선택한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인사가 끝나자 보영씨는 본격적으로 어학원의 수업과 이런저런 활동에 대해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성실한 한국사람의 질문이었다.


"수업시간에 말을 잘 못 알아듣겠어요. 그럴 때는 손을 들고 계속 질문을 하기도 뭐 하고, 그냥 지나가기도 찜찜하고 그래요. 어떻게 하죠?"

"금요일마다 시험 보잖아요. 시험공부는 어떻게 하셨어요? 과락도 있나요?"

"저는 수업에 빠지지는 않을 건데요. 혹시 예기치 않게 빠지게 되면 보강을 받을 수 있나요?"

"주말에 하는 액티비티에 참여해 보였어요? 그거 하면 회화실력이 좀 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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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영씨가 귀여웠다. 한껏 의욕 충만한 태도로 성공적인 어학연수를 하고 싶어 하는 보영씨. 나는 그동안 내가 느꼈던 점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성실한 한국사람의 어학연수기를. 보영씨처럼 수업에 빠지지 않는 사람, 수업시간에 집중하는 사람, 숙제를 꼬박꼬박 하는 사람. 그러나 그 성실하고 모범적인 수업이 전부였던 사람. 후회스러운 것은 더 힘을 줘서 상세하게 전달했다.


"보영씨.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만 우리는, 대충대충 해도 충분히 성실해요. 학교 다닐 때 영어수업 듣는 것처럼 공부하지 말고, 그냥 친구들하고 수다 떨러 간다고 생각하고 어학원에 가세요. 가르치는 사람들도 다 친구라고 생각하고 아무 얘기나 막 하세요. 저는 학교 다니듯 했어요. 그게 많이 후회돼요. 저는 나이 때문에 조금 의기소침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 온 어린 친구들이랑 잘 어울리지 못했어요. 나이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는 사람들인데 말이죠. 보영씨는 그냥 막 놀아요. 나이 생각하지 말고요."

"무슨 말씀인 줄 알겠어요."


보영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또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요, 오전 반 선생이랑 오후 반 선생이랑 발음이 달라서 헷갈려요. 어떤 발음이 더 맞는 걸까요? 발음을 연습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 이 성실한 한국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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