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의 풍경
마지막날까지 어학원에 성실하게 출석했다. 두 번째 주와 마지막주 금요일에는 progress test와 unit test를 한꺼번에 보기 때문에 오전 내내 시험이 있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목요일까지 출석하고 금요일에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마지막까지 마무리를 잘하고 싶었다. 그래서 다른 평범한 날처럼 어학원에 가서 차례차례 두 번의 시험을 모두 보았다.
같이 공부한 일본인 애나와 살림도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애나는 어제 사진을 찍을 때부터 울었다. 어학원에서는 수료생들을 위해 단체 사진을 찍어서 엽서를 제작해 준다. 사진을 찍는데 애나가 자꾸 울어서 사진을 몇 번을 더 찍었다. 옆에서 울고 있는 애나의 등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살림도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의 큰 눈에 서운함이 가득 담겨있었다. 고작 한 달인데,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그렇게 섭섭하구나. 나 또한 아쉽고 섭섭했지만 그런 마음을 크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나이가 들면 그렇게 된다
.
아침에 교실에 들어가니 살림이 열쇠고리를 한 뭉치 꺼내서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시원, 너도 하나 골라봐!"
"나는 준비한 게 없는데..."
"아이,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어서 골라"
나는 쿠알라룸푸르에서 제일 유명한 쌍둥이 타워가 조각된 열쇠고리를 골랐다. 살림과 함께 한 시간을 이 열쇠고리를 보면서 기억하게 되겠지. 리엔이 떠나는 학생들에게 수료증과 어제 찍은 사진으로 만든 엽서를 나워주었다. 수료증과 사진을 받고 애나는 또 울었다. 나의 엽서에는 리엔이 함께 공부한 시간에 대한 소회를 짧게 적어주었다. 'positive person'이라는 단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도 리엔에게 쓴 엽서와 한국에서 가져간 선물을 건넸다.
쉬는 시간에는 그동안 나를 가르친 카밀라, 레이철, 파울라를 찾아가서 엽서와 선물을 건넸다. 그들도 엽서에 나와 함께 공부한 소감을 짧게 적어주었다. 깐깐한 카밀라가 섭섭한 얼굴로 안아주는 데 뭔가 울컥한 것이 올라왔다. 이곳에서 내가 제일 좋아한 사람이라서 그런가.
레이철의 교실에 들어갔다. 레이철이 일어서더니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아주 예의 바른 모습으로 나를 마주 보고 섰다. 그동안 수업시간에 보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어서 조금 당황했다. '얜 왜 이러는 거야? 당황스럽게' 속마음을 감추고 레이철에게 엽서와 선물을 건넸다. 레이철은 아주 점잖은 얼굴과 목소리로(역시 수업시간과는 다른 모습으로) 말했다.
"시원, 여기서의 경험은 어땠어?"
"너의 영어가 좀 늘은 것 같니?
"언제 한국으로 돌아가니?"
"너 그동안 내 수업에 안 들어와서 걱정했어? 많이 아팠니?"
"같이 사진을 찍을까?"
'사진을? 당황스럽다 얘!' 역시 속마음을 감추고 레이철과 셀카를 찍었다. 수료를 했으니 학생이 아니라 연장자로 대하는 레이철의 태도가 당황스러웠지만 격이 다른 인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안녕, 레이철! 너는 정말 못 잊을 거야.
레이철이 휴가를 간 동안 짧게 수업을 진행했던 파울라에게도 인사를 했다. 파울라는 너무 고마워했다. 짧게 만났을 뿐인데 나를 기억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며 영어 공부를 계속하라고 당부했다. 당연하지!
친구들도 엽서에 짤막한 인사의 말을 써 주었다. 명실상부 내 짝꿍이라고 할 수 있는 성실한 코나미는 'Truly thank you for everything'이라고 썼는데 흔한 작별의 말이지만, 그녀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어학원 생활이 한참 남은 코나미. 그녀가 작은 수첩을 꺼내더니 나에게도 몇 자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여행과 한국음식을 좋아하는 코나미에게 한국에 꼭 오라고, 내가 맛있는 한국음식을 만들어 주겠다고 썼다. 코나미는 너무 좋아했다. 그 약속이 꼭 지켜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다이애나! 조용한 다이애나가 먼저 다가와 작별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해서 반갑고 놀랐다. 다이애나가 내 엽서에 작별의 인사를 쓰는 동안 나는 다이애나가 내민 쪽지에 쓸 말을 궁리하고 있었다.
"시원, 한국어로 써줘."
"읽을 수 있어?"
"번역기가 있잖아. 너에게 익숙한 언어로 써줘."
"응 좋아, 그럴게."
익숙한 나의 언어로 다이애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썼다. 너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한다고. 너와 함께 더 많은 시간을 갖지 못해서 무척 아쉬웠다고, 그것이 여기서 가장 아쉬운 점이라고. 너의 계획대로 미래가 펼쳐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살림도 자신의 엽서를 흔들며 다가왔다.
"시원, 너도 한마디 써줘. 그리고 우리 같이 사진 찍자!"
"한국말로 써도 돼?"
"오~ 멋진데! 그렇게 해줘"
한국말로 쓰고 그것을 살림에게 해석해 주었다. 너는 내가 첫 번째로 만난 예맨 사람이야. 이제부터 예맨이라는 나라는 나에게 너야. 너의 섬세함과 친절이 항상 고마웠어. 여기서의 경험이 너의 직장에서 너를 더 성장시킬 수 있길 바라. 정말, 고마워 살림. 나의 어눌한 영어가 내 마음을 잘 담아냈는지 모르겠지만, 살림의 동그란 눈에 얼핏 물기가 서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사람들을 작별했다. 그리고 progress test 결과 나는 마침내 pre-를 떼고 Intermediate반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