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로 마음을 막지 않았더니 발견하게 된 감정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지 5일 차. 머리가 많이 비워지면서 나는 흩어버리려고 애쓰지 않고 올라오는
내 안의 감정을 그대로 마주하면서 걸었다.
그렇게 발견한 감정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건 ‘화’였다.
정확히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화이며, 더 깊게는 부끄럽지만 지난 이성 관계에서 오는 분노다. 누군가를 만나 인연을 맺게 되는 과정에서 이상과 실재의 괴리는 항상 존재해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상대방의 실제 모습에 기반을 두고 생각과 행동을 한게 아니었다. 머리 안에 있는 상대방에 대한 나의 이상을 바탕으로 상대방이 변화하는 모습을 기대해 왔던 것이다.
상대에게서 보았던 아쉬운 점도 언젠가 바뀔 것이라 기대하며 나를 괴롭게 했다. 이제는 머릿속 세상에서 나와, 현재를 직시하는 자세가 필요했다. 사람 보는 눈을 기르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상대의 마음 안에서 따뜻함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순례길에서 각자의 본질대로 살아가는 자연을 바라보며 삶의 이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맑은 햇빛과 하늘, 바람과 흔들리는 밀밭이 어우러지는 모습에서 사람과 사람의 인연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니, 비로소 화가 가라앉는다.
- <나는 왜 산티아고로 도망 갔을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