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피아노 뒤편을 뜯어내기로 했다. 피아노 건반 사이로 두세 번 접은 네모난 보라색 색종이 한 장이 들어가서다. 번거롭고 성가신 일이 생기자 끓어오르는 냄비처럼 속이 부글부글했다.
여유로운 일요일 오전. 아이들은 인형 놀이를 하다가 그림을 그리다가 이번에는 색종이 접기를 하고 있었다. 아침밥을 먹은 후 식탁자리를 치우고, 집안을 청소하느라 엄마는 혼자서 바빴다. 할 일을 어서 끝내고 홀가분하게 휴일의 느긋함을 즐기고 싶어 조바심을 내던 중이었다.
거실에서 청소기를 밀고 있는데 울이가 옆에서 서성였다. 걱정을 살짝 얹었지만 큰일은 아니라는 듯 나에게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색종이가 피아노 건반 사이에 들어갔어.
그래? 그럼 꺼내면 되지.
피아노의 건반과 몸통 사이에 종이가 들어갈 만한 기다란 틈이 있었다. 종이접기를 하던 아이가 문득 피아노의 틈에 색종이를 슬쩍 밀어 넣었던 것 같다. 그랬다가 다시 빼려고 했던 거겠지. 근데 생각보다 종이가 깊이 들어갔고, 자기 힘으로 뺄 수가 없자 엄마를 부른 것이었다. 색종이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려고 몸을 숙여 피아노의 틈에 눈높이를 맞췄다. 한쪽 눈을 감고 다른 한쪽은 실눈을 뜬 채 자세히 들여다봤다. 어른 손으로 한 뼘이 조금 더 될 만한 거리에 색종이가 있었다. 얇은 무언가로 쓱쓱 후벼내면 나올 것도 같았다. 필기구 통을 가리키며 울이에게 말했다.
울이야, 거기 자 있지? 제일 얇은 걸로 가져와 봐.
울이는 자를 여러 개 꺼내어 신중하게 대어보더니, 가장 얇아 보이는 플라스틱 자를 나에게 내밀었다. 두께는 적당했으나 문제는 길이였다. 색종이가 있는 자리까지 자가 닿지 않았다. 끙끙대며 이리저리 쑤시다 보니 색종이가 자에 부딪쳐 건반 뒤편으로 쑥 넘어가버렸다.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일이 더 복잡해졌다. 쉽게 꺼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화가 나기 시작했다.
색종이를 피아노 뒤편으로 밀어 넣은 건 사실 내 실수다. 색종이의 위치를 보고 살살 꺼냈으면 피아노를 분해하는 일은 없었을 거다. 처음보다 일이 커지자 이제는 색종이를 넣은 아이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아 바쁜데, 왜 멀쩡한 피아노를 뜯어야 하는 상황이 온 건지 따져 묻고 싶었다. 뒤로 더 멀리 집어넣은 건 나면서, 애꿎은 아이를 노려봤다. 더는 소용이 없어진 자를 내려놓고 아이에게 훈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게, 왜, 피아노 사이에 종이를 집어넣었어? 왜! 피아노는 손으로 연주하라고 사준 거지, 색종이 집어넣으라고 사 준 거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고장 나면!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다녔다. 그냥 저렇게 색종이를 넣어 두고 쓰면 어떨까. 혹시 연주하는 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그럼 그건 안 되겠다. 수리기사님을 부를까. 출장 비용이 들 텐데 그 돈이면 애들 필요한 걸 사 주지. 그럼 일단 내가 한번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봐야겠네.
부글거리는 마음으로 공구함에서 드라이버를 가져와서 나사를 풀기 시작했다. 뒤판 위쪽 나사 네 개를 풀었는데도 피아노와 뒤편 부분이 분리되지 않았다. 생각보다 단단하게 만들었구나. 피아노의 튼튼함에 감탄했다. 나머지 나사들도 풀기 시작했다. 드라이버를 돌릴 때마다 나사와 피아노가 마찰한 흔적들이 거실 바닥에 우수수 쏟아졌다. 피아노도 상하고 있고 거실에 나무 가루가 떨어지는 것도 불편하다. 뭐 어찌 됐건 색종이만 나오면 되지 뭐. 마음을 다스리며 뒤판을 뜯어냈다. 드디어 보라색 색종이가 보였다. 휴.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쉬웠다. 걱정했던 것보다 별일이 아니었다. 이제 색종이를 꺼내고 다시 조립을 하는 일만 남았다.
모습을 드러낸 색종이(피아노의 뒷부분)
조립한 피아노를 제자리에 옮기고, 나무 부스러기를 쓸어내고 나니 마음이 그제야 편해졌다. 생각해 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 괜히 아이에게 야단치고 다그쳤던 게 미안했다. 소리 지르지 않기로 해놓고서 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이에게 사과하고 싶은데, 그동안 화내고 조금 이따가 소리 지른 것을 사과를 한 적이 많아 민망했다. 버럭 소리를 지를 때는 아이의 눈빛이 보이지 않았는데, 마음이 진정되고 나면 움츠러든 아이의 마음이 보인다. 또다시 미안하다고 말하려니 무안하고 머쓱한 마음에 괜히 잔소리로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울이야, 다음부터 피아노는 손으로 연주만 하는 거야. 종이 집어넣지 않기야.
응. 알겠어, 엄마.
혹시나 피아노가 고장 나서 못 쓸게 될까 봐, 수리기사를 불러서 비용이 많이 나올까 봐 걱정과 불안에 휩싸였다. 해결해 보지도 않고 미리 앞선 걱정들과 불안으로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다.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말했을 아이에게 다정하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엄마, 무심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쓱쓱 일을 해결하는 엄마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좀 더 멋진 엄마가 될 수 있었을까.
괜찮아, 그거 별 거 아니야. 걱정 안 해도 돼, 라고 말할 수 있는 무던하고 너그러운 엄마가 되고 싶다. 다음번에는 불안과 걱정에 휩싸이더라도 아이한테만큼은 세상 쿨하고 편안한 엄마가 되어봐야지. 그럴 수 있겠지. 흐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