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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Aug 04. 2024

호랑이가 시집을 가도 괜찮아

서동욱,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문장을 읽고

  날씨가 우리는 만드는 것이지 우리가 날씨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생각 또는 철학도 날씨가 만들어낸다. 독일의 검은 숲 속에 오두막을 짓고 숨기 좋아했던 하이데거는 오두막에 폭풍이 치고 눈이 오면 그때가 철학자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 서동욱,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중에서


  하늘이 파랗고 구름이 눈부시게 하얗던 오후 네 시였다. 한여름의 쟁쟁함을 알리듯 피부에 닿는 햇볕이 따갑기까지 해 아이를 데리러 갈 때는 모자를 쓰고 양산까지 준비했었다. 아이가 탄 유치원 버스가 올 때즈음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여전히 맑다. 이런 비라면 금방 그칠 비일 거라 생각하고 별생각 없이 기다렸다. 웬걸, 가볍게 보슬거리며 시작하던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다. 해를 가리려던 양산을 우산 삼아 쓰고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갔다. 두 아이가 여우비를 맞으며 호랑이의 결혼에 대해 옥신각신이다.


  호랑이가 시집가는 날인가 봐.

  아니야, 이런 건 호랑이가 장가가는 날이라고 하는 거야.

  해가 쨍쨍한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고, 일곱 살 동생은 맑은 날 내리는 비를 여우비라고 하는 거냐고 묻더니 호랑이의 시집설을 주장했다. 아홉 살 언니는 그게 아니라며 동생의 말을 고쳐주려고 했다. 호랑이가 장가가는 날이라고 하는 거라고. 아니야, 아니야. 내 말이 맞아. 별 것 아닌 걸로 둘이 다툼을 시작하려고 할 때 엄마는 재빨리 중재자가 되어야 한다. 

  호랑이가 시집을 가든 장가든 가든 다 괜찮아. 그러니까 그만.

  여기서 무엇이 맞고 틀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섣불리 사실 관계를 들어, 언니 말이 맞다고 편을 들어주었다가는 동생의 미움을 받을 것을 알고 있다. 누구의 마음도 상처 입지 않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는 게 엄마의 목표다. 싸움의 시작을 어서 멈추지 않으면 한 명이 울기 시작한 후에야 말싸움이 그칠 것임을 알기에 재빨리 화제를 돌려본다. 




  오늘 오후처럼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생각하면 당황스러운 마음보다 설레는 장면이 여럿 떠오른다. 영화 <클래식>에서 남녀 주인공이 소나기를 맞으며 뛰어가는 장면.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 배경 음악은 그 장면을 더욱 설레게 만들어준다. 또는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주인공의 야외 결혼식장에서 장대비를 맞으면서도 유쾌하고 즐겁게 결혼하는 장면. 또는 보통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두 사람이 한 우산을 같이 쓰고 가는데 연인에게 우산을 기울이느라 정작 우산을 든 한 명의 어깨는 흠뻑 젖어있는 장면. 느닷없는 비는 사람들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고 허둥지둥 대처하느라 당황스러우면서도, 나름의 설렘과 멋이 있다.



  아이들의 옥신각신을 중재하면서, 현실도 영화처럼 아름답고 특별했으면 좋겠다고 문득 생각하다가. 영화에서 예쁘게 빛나 보이던 장면도 현실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오늘 나와 아이들의 모습을 카메라로 찍었다면 아마도 이런 그림이겠지. 양산이 비를 맞아서 어떡하냐고 걱정하는 꿍이의 마음과 눈빛, 파란 하늘에서 뜬금없는 비가 내리는 것을 보며 여우비를 생각해 낸 일곱 살 아이의 마음, 동생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을 제대로 알려주고 싶은 아홉 살 언니의 마음, 혹시나 아이들이 다투고 속상해할까 봐 미리 싸움을 막으려는 엄마의 다정한 노력. 연인의 설렘도 좋지만 엄마와 아이들의 이야기도 정겹고 따스하게 보인다. 그러고 보면, 평범한 일상이 어떤 렌즈로 들여다보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하루가 되기도 하고 밍밍하고 아쉬운 하루가 될 수도 있겠다. 내 하루와 일상을 은은하고 빛나게 만들고 싶다면 마음에 특별한 렌즈를 살포시 끼워볼 일이다.



이미지: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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