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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Oct 26. 2023

감기약 먹이기, 가뿐하게 3시간

먹느냐 버티느냐, 전쟁이 시작된다

  “약 먹기 싫어. 안 먹을 거야!”

  “지금 병원 문 닫아서 응급실 가야 해. 응급실 가고 싶은 거야? 빨리 약 좀 먹어!”

  “싫어, 약 먹기 싫어! 맛없단 말이야!”

  까칠이와 버럭씨는 오늘도 소리를 지른다.     


  언제부턴가 나는 버럭씨가 되었다. 전에는 조용하고 친절하다는 말을 종종 듣기도 했다. 다정하다던 성격정작 아이에게는 적용이 안 되었다. 출근 시간에 쫓겨 등교 준비하라고 닦달할 때, 아이가 실수로 엎지른 물을 닦아야할 때, 밥을 먹으면서 돌아다닐 때, 그 사소한 순간마다 화를 참지 못하고 나는 버럭씨가 되었다.


  오늘도 아이와 힘 겨루기가 시작되었다. 까칠이는 열이 나고 있었다. 체온계에 빨간 불이 들어오고, 39.2도가 찍혔다. 기침 소리가 컹컹 했다. 열이 더 오를까 걱정되고 조마조마한데, 까칠이는 맛이 없다며 먹지 않겠다고 버텼다. 대체 약을 안 먹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가슴이 꽉 조이는 듯 답답해지고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까칠이는 어린이집 입소 일주일 만에 병치레를 시작해서 2년 동안 그냥 지나간 감기가 없었다. 한달 중 25일은 약이었다. 소아과를 마트보다 자주 다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까칠이가 약을 곧잘 먹는 아이라는 점이었다. 약병을 건네면 입에 물고 꿀꺽꿀꺽 잘도 삼켰다. 딸기향 시럽이라 그런가 보다 했더니 쓰디쓴 가루약을 섞어줘도 끄떡없었다. 그때만 해도 이대로 까칠이의 우아한 투약 생활을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약 못 먹겠다고 울고불고 하는 옆집들의 소란스러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가 5살이 될 무렵에는 코로나로 마스크를 온종일 쓰는 시기였다. 숨쉬기가 답답해보여 안쓰러웠지만 그동안에는 다행히 잘 아프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에는 마스크를 자율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까칠이는 열이 자주 나고 아팠다. 병원에 가면 목이 부어있다며 일주일 넘게 항생제를 먹어야 했다. 그리고 약 먹기 거부가 시작되었다.      


  “까칠아, 약 먹을 시간이야.”

  최대한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로 약 먹을 시간임을 알렸다. 까칠이는 약병을 보자마자 표정이 일그러졌다. 슬쩍 보더니 “또 가루약이야? 진짜 싫어. 안 먹을 거야!” 소리를 꽥 질렀다. 설득 끝에, 조금 입에 넣어 삼키고 쓴맛에 헛구역질을 하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슬며시 약병을 식탁에 내려놓고 집안 투어를 시작했다. 거실에 가서 책도 조금 보다가, 휴대폰으로 노래를 틀고 음악 감상을 했다가, 방에 가서 누워 있기도 했다.

  “엄마, 5분만 쉬다가 먹을게.” 5분이 지나면, 또 5분, 또 5분이 늘어갔다. 더 기다릴 수 없어 직접 먹여주기로 했다. 까칠이에게 방에 앉으라고 하고 약병을 꾸욱 눌러 입 안에 넣어주었다. 5초 만에 끝.

  ‘이렇게 빨리 먹을 수 있는 걸 왜 시간을 끄는지 몰라.’ 잠시 후 까칠이는 먹었던 약을 방에다 토해버렸다. 저녁밥까지 전부. 까칠이가 아프다고 울고, 나도 같이 울고 싶었다. 이불 빨래 일거리가 생긴 것도 문제였지만 다시 처음부터 약을 먹여야 할 걸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약 먹기 대결이 며칠째 이어졌다. 먹이려는 자와 버티려는 자, 둘 다 자못 비장했다. 약을 먹지 않으면 기침이 심해지고 그러면 병원에 입원해야 할 수도 있다. 약이 쓰지만 먹고 낫는 게 좋은 거다. 내 논리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맛이 없어서 도저히 못 먹겠다는 것이다. 눈 질끈 감고, 삼키면 되는 거 아닌가, 고작 12cc인데 그걸로 몇 시간째 이러고 있는 거야? 화가 난다, 화를 내면 안 된다, 그런데도 자꾸 화가 난다. 결국 참지 못하고 또 언성을 높였다. 까칠이도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이제 까칠이가 감기에 걸리면 약을 어떻게 먹여야 하나 그것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까칠이가 약병을 옆에 두고 또 시간을 끌고 있었다. 선한 티니핑(만화 캐릭터)과 악한 티니핑이 싸우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약을 두고 너랑 나도 왜 이래야 하는 걸까.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던 순간, 문득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행운핑(티니핑 캐릭터) 피규어 하나를 집어들었다.

  “약이 써서 먹기 힘들지? 엄마도 까칠이 힘든 거 잘 알아. 근데 이거 한번 볼래? 행운핑은 사실 감기세균이야. 얘가 진짜 무서워하는 게 있대. 바로 가루약. 쓴맛을 까칠이보다 훨-씬 싫어해서 냄새만 맡아도 펄쩍 뛰면서 도망가거든. 근데 약을 먹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까칠이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기회는 지금이다. 나는 행운핑을 들고 감기세균으로 빙의했다. 약 냄새를 맡고 얼굴을 찡그리며 괴로워하는 감기세균이 되었다.

  “가루약이 너무 싫어. 제발 먹지 마. 목 안에서 계속 놀고 싶어. 너 약 싫어하니까 안 먹을 거지? 먹으면 절대 안 돼!”

  까칠이는 눈을 새초롬히 뜨더니 약병을 집어들었다.

  “흥, 나 약 잘 먹거든!.”

  까칠이는 코를 꽉 막아달라고 부탁하고는 5초 안에 다 삼켜버렸다.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엄마, 감기세균이 뭐래? 힘들대? 도망가고 있어?”

  “진짜 대단한데! 5마리나 도망갔어. 으아악 하면서 멀리 가버리네!” 까칠이가 뿌듯해하며 씨익 웃는다. 이렇게 쉬운 거였다니, 기쁘고 허탈한 마음에 나도 같이 웃는다.


  쓴 약을 먹는 건 8살에게 아직 힘든 일이다. 엄마를 힘들게 하려고 일부러 약을 거부하는 게 아니다. 엄마는 아이가 힘들어할 때 잘해낼 수 있도록 같은 편이 되어서 응원해주어야 한다. 감기약뿐 아니라 다른 것들도.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는 건 아이의 의욕을 꺾을 뿐이었다. 까칠이의 엄마니까, 너에게 잘해낼 수 있다고 힘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이와 한 팀이 되도록 계속 노력하고 싶다. 까칠아, 이제 약 잘 먹을 수 있지? 엄마가 네 편이 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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