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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Dec 26. 2023

남편의 고마운 계획

아버님 어머님, 오늘밤 영화 보러 같이 가실래요?

  남편은 고민 중이었다. 주말부부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엄마아빠는 손주들도 볼 겸, 혼자 육아하는 딸내미를 도와주실 겸, 집에 와주셨다. 덕분에 집안일을 하고 아이들을 보고 밖에 장을 보러 가는 것도 훨씬 편해졌다. 3주 만에 집에 온 남편은 부모님께 뭘 해드리면 좋아하실지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버님, 저랑 목욕탕 가실래요?

  남편이 아빠에게 말했다. 뜨끈한 탕에서 몸을 풀고 등도 시원하게 밀어드리면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아빠는 고마운 마음은 알겠으나 바로 거절하기도 미안해서인지 말없이 웃기만 하셨다. 사위와 목욕탕이라니. 남편은 괜찮을지 몰라 아빠 입장에서는 사위와 목욕탕이라니 민망하고 어색한 제안이었을 거다. (아들만 둘 있는 시어머니도 내가 목욕탕에 같이 가자고 하면 좋아하실지 문득 궁금해졌다.)


  첫 번째 제안이 부드럽게 거절당하자 남편은 다른 것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탄성을 내뱉었다.

  아버님 어머님, 오늘 밤에 영화 보러 가실래요? '서울의 봄' 어떠세요?

  목욕탕보다 훨씬 괜찮은 제안이었다. 야심한 시간에 집을 떠나서 영화를 본다는 건, 9시면 불을 끄고 모두 잠들어야 하는 우리 가족에게는 쉽게 하기 어려운 짜릿한 일탈이었다. 아이들을 재워야 해서 함께 갈 수 없는 나는 슬며시 부러운 마음이 일었다.



  

  저녁을 먹고 뒷정리까지 끝낸 터라 마음이 깃털같이 가볍고 편안했다. 남편이 부모님을 모시고 다녀오기로 했다. 엄마는 사위의 제안에 호기심이 생기면서도 영화표값을 생각하며 선뜻 수락하지 못했다. 여러 번 영화표 값을 물으며 망설이는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며 남편이 말했다.

  할인받아서 가면 괜찮아요. 지금 가면 9시 30분에 영화 시작해서 12시에 끝날 거예요. 집에 오면 12시 30분쯤 될 것 같아요.

  

  남편과 부모님은 따뜻하게 채비를 하고 영화를 보러 집을 나섰다. 나 없이 어색하지 않을까, 불편한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마음에 쏙 드는 크리스마스 영화관 데이트가 되길 바라며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했다.


'영화관 도착'과 '집으로 출발'을 알리는 남편의 문자


  아이를 재우고 나도 스르륵 잠이 들었다. 차가 아파트 정문을 통과한다는 알림음이 들리더니 어느새 남편이 들어왔다.

  아버님 어머님 대만족하셨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엄마는 영화관 가는 길이 어땠는지, 배우들의 연기가 어땠는지, 영화관 안에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뒤에 앉은 학생의 코 고는 소리와 늦은 시간 극장 앞 붕어빵 가게의 상황까지 나에게 전했다. 오랜만의 영화관 나들이가 마음에 쏙 드셨던 모양이다.




  여보는 영화 어땠어? 별점으로 알려줘. 궁금해.

  나는 사실 영화는 그렇게 궁금하지 않았어.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어서 같이 간 거야.

  그러고 보니 남편이 좋아하는 영화는 뭔가가 빵빵 터지고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것들이었던 것 같다. 자기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부모님이 좋아하실 것으로 고민하고 선택한 것이었다니. 새삼 그의 사려 깊음에 마음이 찌르르 울렸다.

  그는 다른 사람이 필요한 것을 잘 살피고 찾아내는 사람이다. 아이들과 한바탕 전쟁 후 울적해진 나를 위해 퇴근길에 카스 한 꾸러미와 샤인머스캣 요플레를 사다 주는 사람. 속상한 일이 생기면 제일 좋아하는 카페에서 부드러운 거품 가득한 돌체라테를 사다 주는 사람.

  공감을 못한다, 문제 해결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자꾸 잔소리하지 말라고 그를 타박하지만, 나에게 가장 위로와 위안을 주는 사람은 남편이다.


  요즘은 그가 위로를 받아야 순간인 듯하다. 갑자기 발령이 다른 지역으로 난 후 생활 전체가 다 바뀌어서 힘든 것 같았다. 새로운 업무를 맡아서 일을 잘 모르는데 자꾸만 일이 쏟아지고, 다른 사람들도 다 바쁜데 하나하나 물어가며 일을 쳐내야 하고, 그 와중에 신입사원까지 들어와 일을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늦게까지 남아 일을 마무리하고 원룸에 들어가면 차갑고 허전한 공간에 외롭고,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아마도 더 힘들었을 것이다.

  가족이 같이 있어야 하는데, 떨어져 있으니 슬프네.

  버스를 타러 가야 하는 날 아침부터 남편의 얼굴이 핼쑥하다. 울적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가 요즘 많이 힘든가 보다. 이번에는 내가 남편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줘야겠다. 남편이 어떤 걸 좋아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미지 출처: 언스플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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