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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Dec 04. 2023

'나쁜 수'는 없다

8살과 41살의 장기 대결

  5일 만에 온 가족이 만났다. 순둥이는 오랜만에 만난 아빠가 낯선지 금요일 밤에는 조금 서먹했다. 짧은 주말을 보내고, 아빠가 다시 회사로 가는 일요일이다. 여유로운 휴일 오전이지만, 남편은 아쉽고 서운한 마음에 거실을 서성였다.


  아빠, 우리 장기 두자.

  그래, 그러자.

  까칠이가 아빠에게 장기를 제안했다. 까칠이는 장기를 둘 줄 모른다. 각각의 기물이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다 다르며, 왕을 잡으면 이긴다는 것 정도를 알 뿐이었다. 수를 놓을 때 아빠에게 묻거나, 아빠가 놓는 방법을 따라 하며 게임을 했다. 아이라고 해서 쉽게 져주지 않는 아빠는 진지하면서도 다정하게 장기를 두었다. 순둥이는 옆에서 나팔을 불며 언니를 응원했다. 햇살 비치는 거실에서 아빠와 딸이 오붓하게 앉아 장기를 두는 모습에 내 마음도 여유롭고 포근해졌다.


부녀 간의 장기 대결




  부서 이동 신청을 하지 말걸. 나 좀 말리지 그랬어.

  남편은 후회하고 있었다. 첫 일주일 동안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새 업무를 시작해서 적응하는 것, 가족들과 떨어져 있는 것, 퇴근 후 늦게 들어가 잠드는 일상이 낯설고 불편했다고 했다. 신입이 아니면서 일을 처음부터 새로 배워야 해서 눈치가 보이고, 하루종일 긴장하다가 퇴근하고 나면 아이들도 많이 보고 싶었을 거다. 무엇보다 자신의 선택으로 이렇게 발령이 난 것 같아 미련이 남는 모양이었다. 부서 이동을 신청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내년 봄까지 함께 있었을 테니까.

  1년 정도 하면 다시 올 수 있지 않을까. 전에 하던 업무 많이 힘들어했잖아. 이번에 새로 배우고 익숙해지면 좀 나을 거야. 이전 프로젝트도 다 끝나면 어디로 발령 날지 모르는 거였잖아.

  좋은 쪽으로, 최대한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하고 말을 꺼내보지만,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다시 돌아갈 생각에 우울해하는 그를 보니 안타까웠다. 남편은 힘들다는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그동안 하소연하는 것은 주로 내쪽이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힘든가 보다. 위로해 주고 싶은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고민하다 꺼낸 말은 그에게 닿지 못하고 공중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장기든 바둑이든 체스든 어떤 것도 한 번 둔 수를 물릴 수는 없다. 수를 둘 때마다 최선의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이미 판 위에 놓아버린 후라면 다음 차례에 둘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모색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좋은 수는 무엇이었을까.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수는 무엇일까.


 과거로 돌아간다면 선택이 달라졌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한 후에 내린 결정이었고, 나도 그의 생각을 지지했다. 결과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그때는 분명 최선의 결정이었다. 어쩌면 시간이 흐른 후에 잘한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나. 모든 일은 장단이 있고, 사라져 버리는 시간은 없으니까, 잘했다고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남편과 떨어져 있는 것이 너무 아쉽고 슬프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이래서 인생은 배움의 연속인가 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회식한다고 타박하지 말고, 쿨하게 잘 다녀오라고 보내줄 것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건강을 챙길 겸 운동하고 오라고 얘기할 것을. 아쉬운 일들 투성이다. 다시 깨달았으니 이제부터 잘하면 되는 거겠지.




  오후 2시 20분. 남편이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오늘 아침부터 그는 초조하게 거실을 돌아다녔다. 한숨을 여러 번 쉬었고, 얼굴빛은 어두웠다. 예전 같으면. 가지 말라고 장난스레 투정을 부렸을 거다. 이번에는 차마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가 가기 힘들어하는 게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다. 남편에게 힘을 주고 응원하고 싶었다. 아빠가 나갈 준비를 하는 사이, 까칠이에게 소곤소곤 신호를 보냈다.

  우리, 아빠한테 깜짝 편지 쓸까?

  좋아, 엄마.

  메모지를 2장 뜯어 각자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저녁 맛있게 먹고 푹 쉬라는 글을 남기는 동안, 까칠이는 알록달록 색연필을 꺼내서 그림을 그렸다. 아빠가 힘들다는 것을 아는 건지, 현관문을 나서는 아빠에게 응원 문구가 적힌 종이도 함께 전했다.


까칠이의 편지

  

  아직 몇 시간도 안 됐는데,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 아빠랑 떡볶이도 먹고, 피구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싶은데.

  저녁을 먹으면 까칠이가 말했다. 순둥이도 맞장구를 친다. 우리가 떨어져 있는 시간, 서로의 소중함과 애틋함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그동안 남편에게 힘을 받고 위로를 얻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그에게 힘을 주고 싶다. 힘든 순간, 서로의 버팀목이 되는, 우리는 가족이다.




상담 이미지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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