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에서 그런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어릴 때의 모든 순간이 어제와 같이 선명할 순 없지만 유년의 기억은 마치 몸에 새겨진 바코드와 같아서,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가도 어느 날 우연히 맞닥뜨린 어떤 것들에 ‘삐빅’ 바코드 인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온다고 말이다. 내 취향의 저 아래 어딘가 가장 근원이 되는 지점은 결국 내 유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말이었다.
내 유년의 기억 중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건 우리 식구의 외식 풍경이다. 또래들 속에서 아저씨 입맛으로 통하는 나의 입맛은 철저하게 울 아버지의 단골집에서 얻은 것이다. 지금 불현듯 생각난 곳은 율전동에 있던 아주 허름한 순대국밥집. 뻑뻑해진 샤시 문을 옆으로 밀어서 여는 오래된 국밥집이었다. 순대국밥 뚝배기가 반질거리는 알루미늄 쟁반에 들려서 내 앞에 놓이면, 예닐곱 살쯤 되던 나는 아빠가 하시는 그대로 따라서 순댓국에 새우젓 반 스푼을 넣어 간을 맞추고 머리 고기를 먼저 건져 먹었다. 뚝배기에서 김이 펄펄 나는 국밥을 밥공기에 덜어서 식혀 드시던 아빠의 버릇도 어김없이 따라 했다.
주말에 시골 할머니 댁에 내려가면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새까만 새벽에 할머니를 모시고 덕산 온천으로 가서 목간 하고(목욕한다는 뜻의 충청도 사투리), 해장국집에 들러서 벌건 선지가 한 덩어리씩 담긴 선지 해장국에 밥을 말아먹었다. 국밥 한 숟가락을 크게 뜨고 그 위에 뻑뻑하지만 씹을수록 고소한 선지와 해장국 국물에 녹아든 시래기를 얹어서 한 입 가득 우물거리며 먹으면 절로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속을 뜨뜻하게 해주는 국물은 안 그래도 목욕 후에 노곤해진 몸을 한층 더 노곤해지다 못해 흐물거리게 했다.
토요일 오후 한나절은 온 식구가 할머니 텃밭에서 보내고, 저녁이면 모두가 피곤함으로 떼꾼해진 눈을 비비며 읍내에 나가 아빠 고향 친구분의 어머님이 하신다는 곱창집으로 갔다. 쿰쿰한 돼지 냄새가 나는 곱창을 연탄불에 구워 먹는 곳이었다. 한 입 크기로 잘린 동글 넓적한 곱창을 나무 주걱으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는 걸 끈질기게 쳐다보면서 엄마 입에서 "이제 먹어도 돼"라는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오빠와 함께 무진장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두툼한 한 점을 골라 집어서 소금장을 찍고 입에 넣으면 기다린 보람이 구수하게 느껴졌다. 쫄깃한 돼지 곱이 짭짤한 소금장에 어우러져 입 안에서 오랫동안 질겅거렸다.
내 유년시절의 외식 풍경은 이랬다. 90년대생인 나에게 그 흔한 돈가스나 피자, 스파게티를 먹으러 네 식구가 다함께 간 기억은 신기할 정도로 전무하다. 그나마 엄마랑 오빠랑 셋이서는 아빠가 늦게 들어오시는 평일 저녁에 간간히 롯데리아에서 불갈비버거도 먹고, 스카이락이란 패밀리 레스토랑에도 가고, 초등학교 때 한창 떠올랐던 아웃백도 종종 갔었지만 우리 식구 넷이서 가는 식당은 늘 아저씨 입맛의 음식점이었다. 그때의 기억들이 내 입맛을 지배하고 있어서 그런지 문득 못 견디게 그리운 음식들은 전부 쿰쿰하고 꾸릿한 맛의 아빠 음식이다.
꼭 잠들기 전에 사무치도록 생각나는 그때의 순대국밥과 선지 해장국, 돼지곱창. 그 뜨끈한 생각만으로도 타국생활에 지쳐 피곤한 마음을 잠깐이나마 뉘이는 것만 같다. 하루의 끝에 그 음식들이 있었더라면 오늘이 덜 고달프지 않았을까. 무거운 머리를 뉘이고 가만히 오늘을 정리해본다. 그리고 나를 돌아본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어떤 신비한 끈으로 이 사람들과 이어지게 되었을까. 내 자리의 시작점을 찾아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 질문의 대답에는 내 유년의 바코드를 공유하는 어느 지점이 신기하리만큼 반드시 있었다.
나의 밑천이 된 소박한 추억들이 그 어딘가에서 바코드로 ‘삐빅’ 인식되던 순간, 나는 맘 놓고 좋아하고 싶어 졌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