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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타날 현 Jun 02. 2020

나의 이름

     나는 내 이름을 좋아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좋아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내 이름을 말해주는 순간도 좋다.


     “예쁠 아, 나타날 현, 아현이예요. 세상에 예쁘게 나타나라구, 저희 아부지가 엄마를 만나시기도 전에 스무 살 때 지어놓으신 이름이래요.”


     누가 묻지 않아도 내 이름의 역사를 줄줄 말해주기도 한다. 스무 살이었던 아빠가 나를 위해서 이름을 지어놓으셨다니, 그 생각만으로도 내 이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안동 김씨의 항렬에 따라 돌림자인 ‘나타날’ 현(顯)은 이미 정해진 상태였고, 한 글자만 더하여 ‘어떻게 나타날지’만 정하면 되는 거였다. 옥편을 펼쳐놓고 상상으로 그려본 딸내미의 모습에 잘 어울리는 단 하나의 글자를 찾느라 샅샅이 살펴보셨을 아빠. 예쁠 아(娥)라는 한자는 그래서 내 눈에 더 예쁘게 보이나 보다.


     내가 태어난 사월의 봄날, 스무 살 때부터 지어놓은 딸의 이름을 붙여 “아현아”라고 부르셨을 때의 아빠의 두근거림은 아직 아이가 없는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하겠다. 도대체, 스무 살의 아빠에게는 어떤 말랑이는 마음이 일었기에 딸의 이름을 미리 지어놓으신 걸까. 이제 갓 성인이 되어 어른이 되었다는 자부심이었을까. 운명의 짝을 만나서 가정을 꾸리고 싶은 기대감이었을까.


     내가 세상에 나왔을 때 그는 서른한 살이었기에 나는 아빠가 태어났을 때부터 삼십 대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아빠에게도 젊음이 있었고 꿈이 있었고 로맨스가 있었겠다는 생각이 내가 삼십 대가 되고 나서야 들었다. 대학 미팅에서 한 여자를 만나고 2년의 구애 끝에 그녀와 같은 미래를 꿈꾸게 되었을 때의 아빠. 그 시절의 아빠를 상상해보는 건 마치 출가하기 전의 스님의 일상을 그려보는 것만큼이나 어쩐지 불편하고 낯설다고만 생각해왔는데, 이제는 그 시절의 아빠가 궁금해진다. 아빠는 어떤 확신으로 한 가정을 꾸릴 생각을 했을까. 오빠랑 내가 없던 시간에 아빠와 엄마는 어떤 대화를 나누고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그리고 또 어떤 마음가짐으로 자식이 둘이나 생긴 가장으로 살게 되었을까.

 

     멈출 수만 있다면 어른이 되는 걸 멈추고 싶은 그런 날이면 그 시절의 아빠를 생각한다. 아빠도 그런 날이 있었을까. 술냄새가 잔뜩 배어있는 턱수염으로 내 볼을 마구 부비고서 입술을 쭉 내밀어 뽀뽀해주던 아빠의 그 밤이 그런 날이었을까. 아침에 멀끔하게 면도해서 맨질했던 아빠의 턱이 하룻저녁 새에 거칠해지는 그 하루 동안 젊고 혈기 넘쳤던 아빠에게 닥쳤을 고뇌와 고독함이 어렴풋하게나마 그려진다. 그보다 더 젊은 날에 지어놓은 내 이름을 부르며 여린 볼에 턱을 부비는 것으로 아빠에게 위안이 되었기를 뒤늦게서야 바라본다.


     아빠가 불러주는 내 이름이 유난히 귀에 그리운 오늘. 아빠가 아닌 다른 사람이 불러주는 내 이름에도 어쩐지 아빠의 목소리가 얹혀 들리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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