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으로 인해 내 존재가 맑은 유리알이 되기를.
그곳에 서기 전까지 나는 무거운 외투를 입고 있었다.
세상이 강요한 이름들, 버리지 못한 해묵은 상처들,
그리고 '나'라는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쌓아 올린 견고한 성벽들.
그 회색빛 갑옷은 너무도 단단하여
그 어떤 빛도 내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하지만 거대한 초록의 바다, 그 숭고한 지평선 앞에 서는 순간
성벽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바람이 불어와 숲의 향기를 실어 나를 때마다
나를 감싸던 불투명한 껍질들이 한 겹씩 벗겨져 나갔다.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가벼워졌다.
가장 깊은 숲의 한가운데서, 나는 생애 처음으로
내가 사라지는 기쁨을 맛보았다.
이제 초록은 내 피부를 통과해 뼈마디 사이사이에 스며든다.
나는 더 이상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 아니라,
빛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맑은 수면이 된다.
초록이 나를 관통해 나갈 때,
내 안의 어두운 구석들은 엽록소의 세례를 받고
하나둘씩 연한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나를 바라볼 때, 그들은 이제 '나'를 보지 못한다.
내 몸이라는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흔들리는 들판과 높푸른 가을 하늘을 본다.
"당신은 어디 있나요?" 그들이 물으면
나는 대답 대신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로 웃는다.
내가 투명해질수록 세상의 푸르름은 내 안에서 더 선명해지고,
나는 마침내 내가 사랑하던 그 풍경 자체가 된다.
투명해진다는 것은 곧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친 이들이 내 앞에 섰을 때,
그들은 나의 오만함에 부딪히지 않고
내 안에 고여 있는 맑은 숲의 정적 속으로 곧장 걸어 들어온다.
충혈된 그들의 눈동자가 내 투명한 가슴에 닿으면
도시의 독기가 가라앉고 태고의 평온함이 전염된다.
나는 이제 스스로를 '나'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나는 누군가의 지친 시선이 머물다 가는 투명한 쉼표이며,
대지가 하늘을 향해 내미는 맑은 고백이다.
나의 숭고함은 내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없이 맑아져 사라지는 데 있다.
심장 속의 숲은 이제 내 몸 밖으로 흘러넘쳐 들판이 되고,
내 눈동자에 담겼던 가을 하늘은 비가 되어 대지를 적신다.
내가 투명하게 비워진 그 자리에
누군가 다시 찾아와 자신의 싹을 틔울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영원토록 사라져도 좋으리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미학이다."
초록의 숭고함 앞에서 투명해진 한 사람의 유언.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이제 사람도,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바람에 일렁이는 끝없는 초록의 물결과
그 사이를 통과해 지상으로 내려앉는
눈부시게 맑고 투명한 햇살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