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이 되어 타인의 지친 눈을 덮어주기 위해
그는 생의 마지막 페이지에 마침표 대신 초록색 점 하나를 찍었다.
사람들은 물었다. 왜 하필 녹색이냐고.
그는 대답 대신 창밖의 숲을 가리켰다.
그곳엔 세상의 모든 비명과 눈물을 흡수하고도
아무런 불평 없이 다시 잎을 틔우는 거대한 침묵이 있었다.
그는 그 침묵을 닮고 싶어 했다.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의 가슴속에 은밀한 숲을 가꾸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미움과 욕망의 불을 지필 때마다
그는 심장 가장 깊은 곳에 습한 이끼를 깔고 어린 묘목을 심었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은 날이면 그는 자신의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
제 손으로 심은 나무의 껍질을 만지며 숨을 고르곤 했다.
심장의 고동은 곧 숲의 맥박이 되었다.
그의 혈관 속에는 붉은 피 대신
투명한 수액과 싱그러운 엽록소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홀로 서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의 안에서는 수천 마리의 새가 지저귀고,
이름 모를 들꽃들이 계절마다 피고 지는 우주가 자라나고 있었다.
그의 눈은 언제나 높고 푸른 곳을 향해 있었다.
지상의 소란함에 눈이 멀지 않도록,
그는 가장 맑은 가을날의 대기를 길어 올여 망막에 채웠다.
사람들이 그의 눈을 들여다볼 때면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청명한 허공에 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가 보는 세상은 남들과 달랐다.
그는 콘크리트 틈새에서 피어난 잡초의 녹색에서 우주의 섭리를 보았고,
저무는 노을 앞에서도 슬퍼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 이미 영원히 지지 않는
가장 푸른 하늘의 조각을 박제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도시의 불빛에 화상을 입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세상의 원색적인 욕망에 눈이 시려 눈물 흘리는 이들에게
그는 조용히 다가가 가슴을 열었다.
"이것이 나의 미학입니다."
그는 자신의 가슴 속에서 가장 부드러운 푸르름을 꺼냈다.
그것은 갓 돋아난 어린잎의 촉감이었고,
수술실의 벽면처럼 차갑지만 다정한 안식이었다.
그는 그 푸르름을 펼쳐 사람들의 충혈된 눈 위에 덮어주었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통증이 멎고
회색빛 절망 위에 연한 초록의 안심이 돋아났다.
그는 타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숲을 베어내어 그늘을 만드는 이였다.
마지막 순간, 그는 침대가 아니라 흙 위에 누웠다.
그의 몸은 이제 거대한 들판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확장되는 것이다."
그가 마지막 문장을 대지에 적었을 때,
그의 육신은 한 줌의 비옥한 흙으로 돌아갔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기적처럼 다시 싹이 돋았다.
이전보다 더 연약하지만, 이전보다 더 질긴 생명의 빛.
그것은 그가 평생을 바쳐 가꾼 '녹색 미학'의 완성이었다.
바람이 불자, 그가 남긴 들판이 거대한 파도처럼 일렁였다.
세상은 다시 한번, 말할 수 없이 눈부신 초록으로 젖어 들었다.
그는 이제 어디에나 있고, 동시에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가 길을 걷다 마주치는 모든 싱그러운 잎사귀가
실은 그의 못다 한 고백이자,
우리를 위해 남겨둔 그의 심장 조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