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다. 어느 분야든 위대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일만 시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한 4만 시간 정도를 쏟은 일이 있다면, 어떨까? 네 배의 전문가가 되었으려나, 이미 득도한 산신령처럼 에헴 하고 구름 위를 날아다닐까? 현실은 참으로 얄궂기도 하지. 그저 오늘도 버스에 지하철에 몸을 싣고 한참을 달려 출근하고 퇴근할 뿐이다. 서울에 맞닿아 있다고는 하나 도심까지는 한참의 거리가 있는 수도권 어느 외곽 아파트에 사는, 대기업 20년 차 이 부장 이야기다.
요즘 같은 세상에 대학 졸업하자마자 들어온 첫 직장에서 20년째 근속한다는 건 참으로 흔치 않은 일이다. 20년 차의 대기업 부장을 떠올리면 요즘 드라마에 나오는 눈썹 두둑하고 꼰대미 철철 넘치는 중년의 아저씨가 그려지겠지만, 내가 아는 이 부장은 여전히 어리고 젊고 꼬마 같다. 이른 나이에 입사해서 한 번의 진급 누락 없이 참으로 자기답게 똘똘하고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온, 여전히 장난기 넘치고 소년미 가득한 마흔 중반의 남자. 첫사랑에 대한 의리를 지키듯 첫 입사한 회사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여전히 간직한 채 하루 8시간, 주 5일, 한 주에 40시간, 1년이면 2080시간, 20년이면 41600시간, 연차니 공휴일 같은 걸 제외하면 대략 4만 여 시간. 그 길고 많은 순간들을 거쳐오며 그는 성인이 되었고 남편이 되었고 아빠가 되었다. 서울은 아니지만 산과 강이 드리워진 여유로운 신도시 대형 평수의 아파트를 대출 1원 없이 마련하고, 유니콘 같은 어린 딸과 함께 한 해에도 몇 번씩 해외로 여행을 떠나고, 매일 저녁 세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재잘재잘 하하 호호 마주하는 일상까지. 어쩌면 대단한 성공이랄 것도 없지만 사실은 꽤 안락하고 풍요로운 하루하루를 일구어낸 것은 오롯이 그가 쏟아부은 4만 시간의 공이다.
요즘의 어린이들은 꽤 다르다고는 하나, 우리가 유년시절을 보낸 20세기에는 꿈, 혹은 장래희망에 ‘회사원’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린 시절의 이 부장 또한 마찬가지였겠지. 물론 그의 성향이 변화무쌍한 걸 즐기거나 위험부담이 있더라도 ‘큰 한방‘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그의 발을 좀 더 무겁게 하고 오늘에 묶이게 만드는 것이 내 삶의 책임과 무게마저 그에게 온전히 위탁해 버렸기 때문은 아닐지, 조금 더 날아오를 수 있게 북돋았어야 하는 건 아니었을지, 가지 않은 길, 잡지 않은 선택들이 가끔씩 마음에 걸린다. 어느덧 다 자라 버린 소년의 눈에서 설렘과 즐거움, 열정보다 일상의 피로와 권태, 지리함이 더 짙게 묻어나는 순간들을 마주하면, 가만히 이마를 쓸어주고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 말고 무엇을 더 해줄 수 있을까. 이다음 언젠가 이 모든 것의 끝에 다다랐을 때, “우리 참 잘 살았다.”라고 손 꼭 잡고 웃을 수 있을까. 어린 시절 두 눈을 반짝이던 또랑또랑한 꼬마, 잘 자란 아들, 자랑하고 싶은 모범생 소년이 꿈꾸던 어른의 모습은 얼마큼이나 오늘의 그에게 살아있을까.
10년 전 이맘때 10주년 근속상을 받던 날, 퇴근하고 온 그와 마주 앉아 발렌타인 30년을 따르며 얘기했었다. “10년 동안 수고했어, 앞으로 20년 더 부탁해.”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미래였기에 그저 가볍게 농담처럼 주고받은 이야기들이 어느덧 문득 이렇게 훅 하고 찾아왔다. 아마도 다음 10년은 더 빠르게 달려오겠지.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에 가속도가 붙는다고들 하니까. 중년의 위기도 우리라고 전부 슉슉 피해 갈 수는 없겠지. 그래도 지금까지 그래왔듯, 작은 돌부리는 폴짝 뛰어넘고 큰 바위는 슬쩍 피해보며 험한 산 높은 산 정복하려들기보단 오름직한 동산을 산책하듯 거닐며 손에 손 꼬옥 잡고 함께 걸어가야지. 영민했던 소년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대단한 야망과 성취를 자랑하는 것보다 자그마한 일상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걸. 인생이 꼭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런 사소한 물결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물처럼 바람처럼 살아가는 것 또한 지극히 보통의 평범한 삶이라는 걸. 그리고 그 보통의 평범한 삶이라는 게 쉬이 얻어지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30주년 근속이란 건 있을지 없을지 불투명하다만, 이렇게 흘러가다 보면 또 훅 하고 눈앞에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10년 후여도 겨우 50대 초중반, 여전히 첫사랑을 간직한 채 혹은 오래오래 익혀온 의리로 이 회사에 2만 여 시간을 더 쏟아부을지, 다른 어떤 흐름이 우리를 어디론가 인도할지. 냇물이 흐르다 강이 되고 바다를 만나기까지 그저 힘차게 유속을 유지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나 싶지만, 그저 바라는 것은 흐르는 동안 지나는 모든 순간이 이왕이면 재미있고 행복하기를. 혼자라는 생각 들지 않도록 꼭 잡은 두 손 서로 놓치지 않기를. 흐르다 어디엔가 갇혀 바다로 가지 못하고 산속의 옹달샘이 되더라도, 새벽에 토끼의 목을 축여줄 수 있다는 것 또한 충분히 의미 있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우리의 마음이 변치 않기를. 여전히 철 모르는 소년과 소녀 같지만 어느덧 중년으로 분류되는 삶의 한가운데서 가만히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