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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군 Sep 24. 2015

일탈

하나, 둘, 셋…. 아…. 고작 세 걸음을 채 딛기도 전에 남자의 미간은 한껏 찌푸려지고, 후회의 탄식이 입 주위를 맴돈다. 문이 열리기 전까지가 환상이었다면, 뜨거운 햇살이 온몸을 녹여내는 시멘트 바닥 위는 너무도 철저히 현실이다. 달리는 무궁화호 맨 뒤 칸 난간에 서서 멀어져가는 풍경을 바라본 것은 시원한 바람이 함께하던 가을 무렵이었음이 분명하다. 아니면 아직 그의 상상력은 현실을 고려하기엔 여전히 무디거나. ‘상동’역. 굳이 이 역이었어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소싸움이 생각나는 ‘청도’와 영화의 장면이 두서없이 밀어닥치는 ‘밀양’에 비해 아무런 이미지가 없다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일까. 마침 부산까지 한 시간 남짓 남은 지점이라는 것이 무슨 계시인 양 그를 기차 밖으로 밀어냈다. 그렇게 그는 같은 듯 다른 또 하나의 시골 역 플랫폼에 덩그러니 서 있다.

개찰구를 통과한다. 그래도 10년쯤 전엔 승차권이 있었고, 목적지의 개찰구를 통과할 때면 기념품 같은 승차권을 뺏기듯 반납하는 게 못내 아쉬웠는데, 전자 승차권은 그런 미묘한 감정의 동요를 빼앗아버렸다. 충동적으로 기차에서 내린 남자의 일탈이 조용히 간직될 가능성도 함께 사라진다. 이건 이 나름대로 시원섭섭하다. 일탈이 이제 막 시작된다는 것을 위안 삼아 남자는 역을 나선다. 휑한 역사 밖. 당연하게도 관광 안내 시설 따윈 찾을 수 없다. 역사 광장을 막은 가로수를 바라보다 습관적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꺾는다. 시작은 일탈이지만 결국 그를 채우는 것은 일상성이다. 그렇게 낯선 공간 속 가로수 벽을 익숙한 듯 우회하며 작년 어느 무궁화호 난간에 기대어 상상한 카페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밝은 햇살이 통유리를 넘어 가게를 가득 채우는 조용하고 포근한 카페를 꿈꾼다. 프랜차이즈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과 아르바이트 여학생이 조금은 귀여웠으면 하는 바람도 잊지 않는다. 그저 여유롭게 책을 읽고, 글을 좀 끄적거릴 뿐이겠지만, 낯선 공간에 대한 설렘은 기대를 한껏 키운다. 그가 내려선 뜨거운 플랫폼과 시선의 끝에 자리한 허름한 순두붓집이 그를 현실로 데려오지 못한다.

가로수 벽 너머의 세상은 그의 상상보다 단조롭다. 쭉 뻗은 왕복 2차선의 길은 과연 누가 지나칠까 싶지만,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1톤 트럭과 먼지가 잔뜩 낀 검은 SUV가 그를 질러간다. 그리고 다시 적막. 가로수 벽을 마주하는 건물들에선 막 지나쳐온 순두붓집 이상의 활기를 찾을 수 없다. 띄엄띄엄 지어진 건물들과 그 사이를 메우는 나무들이 이곳의 일상을 대변한다.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골목길이 상상 속의 카페를 감추고 있을 것 같아 마지막 희망을 쥐어짜 발걸음을 옮긴다. 스무 발자국을 채 딛기도 전에 골목의 입구를 마주한 남자의 희망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한 블록이 채 되지 않을 골목은 야산도 논밭도 아닌 황무지에 맞닿아 있는데, 그 뒤가 궁금하지도 않다. 카페가 거기 없음이 자명하고, 내리쬐는 햇볕 아래 자연은 그에게 어떠한 안식도 주지 못한다. 뒤늦게 휴대폰을 꺼내 지도를 확인한다.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면 학교와 하나로마트가 있지만, 그것이 전부다.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강물을 마주할 의지도 없다. 그런 것쯤은 이미 플랫폼에 발을 딛는 순간 날아가 버렸다. 이 조그만 마을은 그에게 더는 어떤 환상도 허락하지 않는다. 일탈이 무너져도 남자는 그들의 일상 속으로 녹아들지 못한다. 애초에 그는 그곳에 있어선 안 될 존재다. 그렇게 다시 역 쪽으로 몸을 트는데 ‘노래방’이라 쓰인 간판이 그의 시선을 붙잡는다. 실소가 나온다. 예상할 수 없는 단어이기에 더없이 신선하다. 물론 굳이 그 문을 두드리진 않을 것이다. 다만 그의 일상이 여기 이렇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이 우습다. 어느 노래방의 일탈이 오랜 시간을 들여 이곳의 일상 속에 녹아든 것인지. 저 노래방도 오랜 세월 버티고 앉았지만, 아직은 그에게 더 가까운 것 같다. 데려오지 못하는 그것은 그대로 두고, 남자는 다시 역사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허름한 에어컨이지만 저 노래방보단 제자리를 잘 찾은 것 같다. 그는 창구 위 열차 시간표를 잠시보다 이내 휴대폰을 꺼내어 든다. 그의 일상은 두 시간쯤 뒤를 달리고 있다.


#계간지 #일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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