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대리

아무도 대리하지 않는, 대리

by 익군

대리가 되었다. 대리. 무엇을 대신한다는 뜻일까. 원래 어원을 보자면 유사시에 과장의 역할을 대신한다 하여 '과장 대리'였던 것이 편의상 과장은 빠지고 대리라는 직함으로 남았다고 한다. 나는 '유사시' 과장을 대신하는 대리가 된 것이다. 변수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유사시'란 어떤 상황을 일컫는 것인지도 모호했고, 그럼 그 유사시가 아닌 상황에서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도 모호한, '대리' 이 어정쩡한 단어를 안고 나는 새로운 한 해를 시작했다.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지금도 그 여운은 곳곳에 남아있다.) <미생> 속 장그래의 사수 김동식 대리는 때로는 팀장인 오상식 과장에게도 훈수를 둘 정도로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사실 다른 팀의 대리들을 봐도 <미생> 속 대리는 과장을 대리하고도 남을 베테랑으로 묘사된다. 인턴/사원과의 극적인 대비를 위해 그렇게 그려진 것이겠지만, 그들은 고작 몇 년 후배쯤 되는 이들에게 그럴싸한 충고, 훈수를 둘 수 있는 경험 있고, 일 잘하는 선배들이었다.


현실의 대리는 그렇지 않다. 적어도 나는 그렇지 못했다. 하룻밤을 더 자고 서른이 된다고 나라는 사람이 급변하는 것이 아니듯, 전자 게시판에 승진 발령이 뜬다고 갑자기 팀의 일 정도는 혼자서도 쉽사리 처리할 정도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일은 게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냉정하게 보면 사원이 대리가 된다는 것이 '레벨 업'과 같은 것이라 말하기도 힘들다) 1월 2일에 출근한 나는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컴퓨터를 켰고, 여전히 같은 업무를 처리했고, 같은 방식으로 수익을 올리거나, 시장에 휘둘리며 손실을 봤다.

재밌는 것은 또 있었다. 스무 명 남짓한 부서에 과장이 예닐곱은 됐는데, 여기에 열에 가까운 대리가 있었으니, 누가 누굴 대리한다는 것인지 모호했다. 그 많은 과장이 다 제 역할을 못 할 유사시가 있을까도 싶었지만, 설령 그런 순간이 있다 해도, 나는 그중에서도 마지막 대체자였다. 사원이 서너 명 있는 곳의 막내 대리란 결국 '과장 대리'의 줄임 말이기보다는 '사원 대리'의 줄임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하는 '사원 대리'. 군대로 치자면 일개미라는 일병과 같은 것이었을까.


작년 승진자 발표가 있기 전에 조금 걱정한 적이 있었다. 부서에 승진 대상자는 많고, 나는 순번이 마지막쯤 되는 것 같았다. 승진되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누락'이란 낙인이 찍히고 싶지 않았다. 되고 싶다기보다는 안되지 않았으면 하는 심리가 더 컸을 것이다. 역시 예상대로 승진이 업무 능력/범위/책임의 변화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었다. 다만, 최소한의 성실성을 인정받고, 회사가 또는 사회에서 말하는 '정상적인' 루트를 따라가고 있다는 안도감이 있을 뿐이었다. (지금은 인정, 안도감 등을 외부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당시엔 그랬다.)


때론 시간의 분절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 같다. 2년 차는 3년 차가 되고, 사원은 대리가 된다. 새로운 기가 시작하고, 작년의 성과가 어찌 되었든 올해는 그것보다 더 나은 성과를 거두자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사이에 놓인 시간은 고작 하룻밤이다. 그것도 뜬눈으로 지새운다면 1초 남짓일까. 그 짧은 시간에는 벼락을 맞아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작년 말 무렵의 나와 같은 나였다.

호칭의 변화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사원이 장대리가 된다고 갑자기 누군가를 대리할 수는 없었다. 그저 일종의 선전포고 정도일까? 너는 이제 대리가 되었으니 더 많은 책임과 더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쯤 되는 선언. 어쩌면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상급자들도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문장만 되뇔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에게 '대리'란 '어딘가에서 대리까진 해봤습니다.'로 남았다. 적당히 남들처럼 살아는 봤다는 말을 대신하고 싶을 때 꺼내 드는 카드 정도다. 하지만 끝내 아무도 대리할 수 없는 대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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