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2015년 9월 - 1

by 익군

내 이름은 박진규. 올해로 28살. 취업 재수생. 이제 꼬박 3개월 하고 보름이 지나면 내 나이도 29살이 된다. 이 기세라면 내 이름 박힌 명함 하나 갖지 못하고 나의 20대는 저물 것이다. 재수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빠른 친구는 고등학교 3학년이 시작될 무렵부터 부지런히 대학을 찾아 들어갔는데, 나는 그때도 남보다 느렸다. 친구들이 OT에 간다고 신났을 무렵, 나는 학원 접수대에 서있어야 했다. 곁에 있는 친구들보다 항상 조금씩 모자란 성적이었지만 내가 딱 그 정도이려니 할 뿐이었다. 딱 그 정도만 해도 중학교를 가고, 고등학교를 가는데 문제가 없었다. 딱 그만큼 이었다.

그 해 처음으로 불안을 느꼈다. 내 삶에 처음 찾아온 어긋남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더 이상 남들 같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찬성, 혁수와 함께하는 술자리가 좋았다. 함께 술잔을 기울일 땐 그들이 여전히 나의 친구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만큼은 내가 못 미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친구들과 적당히 마시고 적당히 취했다. 그렇게 적당히 시간을 흘려 보내니 나는 다시 적당한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올해 초 나는 다시 한 번 인생의 어긋남을 느꼈다. 또 한 번의 재수. 친구들은 재수 학원에 등록한 나를 위해 "재수는 필수! 삼수는 선택!" 이란 구호를 외치며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올해 초엔 때가 되면 다 들어가게 되어 있다고 마음 편하게 가지란 덕담을 건넸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내가 원래 남들과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아마 나의 이름이 박힌 명함 하나 없이 20대를 보내겠구나 싶었다.

하반기 공채 입사 지원서 항목을 보다 한숨이 나왔다. 작년이랑 양식이 죄다 바뀌어 있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새로 작성하려니 막막했다.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데 혁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야 너 오늘 뭐하냐?"

"뭐하긴 자소서나 써야지."

"어, 너 왜 목소리가 그렇게 푹 죽어있냐?" 별로 살가운 녀석은 아닌데, 이런 건 귀신같이 알아챘다.

"이번에 자소서 양식이 다 바꼈네."

"뭐야, 벌써 하반기 시작됐나? 그럼 당분간 보기 힘들 텐데 시작하기 전에 한 잔 찐하게 해야지?"

'보기 힘들긴 무슨.' 이런데 갖다 붙이는 건 천부적이다. 아마 무슨 이야기를 했어도 그걸 핑계 삼아 나를 기어코 불러냈을 것이다. 어차피 끌려 나갈게 뻔해 고분고분 그가 일방적으로 던져놓는 시간에 맞춰 신림 역으로 나갔다.

"찬성이는 또 늦는덴다. 우리 먼저 어디 들어가 있자." 나보다 먼저 나와있던 혁수는 나를 보자마자 돌아서서 앞장섰다.

"넌 야근도 없냐?" 입을 닫으면서 벌써 몇 번은 물어본 질문이었다는 게 생각났다. 녀석은 지겹지도 않은지 똑같은 말을 늘어놨다.

"꼭두새벽에 출근해서 일하느라 점심도 겨우 앉은자리에서 해결하는데 야근까지 해야 되냐. 그런 직장이라면 애당초 그만 뒀을 거야. 난 찬성이 놈처럼 고래고래 욕할 회사라면 옛날에 때려치웠을 거다. 그놈은 오늘도 나타나자마자 술을 세 잔 들이키고 회사 욕을 쉬지 않고 할 거야. 두고 봐."

자리를 잡고 고기가 적당히 먹기 좋게 구워졌을 때쯤 찬성이 피곤에 절은 얼굴로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연거푸 소주 세 잔을 입에 털어 넣더니 고기를 입에 넣으며 포문을 열었다. 지치지도 않는지 정해진 큐시트를 반복하여 연기하는 신인 연기자처럼 매번 똑같은 대사로 입을 열었다.

"아 이 좆같은 회사 때려치던지 해야지 진짜."

이쯤 되니 혁수가 똑똑한 건지 찬성이가 단순한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아마 둘 다 맞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