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부터 혁수는 무엇이든 쉽게 쉽게 해내는 친구였다. 쉬는 시간엔 신나게 놀다가 수업 시간만 되면 정신을 못 차리고 꿈속을 헤맸는데, 성적은 전교에서 수위권을 다투곤 했다. 3년을 일관되게 졸음과 싸우던 녀석은 결국 수능이 한 달 보름 정도 남은 시점에 대학 최종 합격 통지를 받았다. 대학교 1학년이 끝나자 빙긋 웃으며 훈련소로 향했던 녀석은 불평 한 번 없이 2년을 보냈다. 복학을 해서도 쉽사리 학교 생활에 적응하더니, 내가 어영부영 밀린 학점들을 메꾸기 위해 5학년으로 학교를 다닐 무렵에 그는 이미 석사 졸업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논문 심사니 뭐니 잠시 궁시렁 거리 더니 이내 번듯한 대기업에 둥지를 틀었다.
그에 비해 찬성이는 조금은 인간미가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 그 녀석도 혁수랑 별반 다를 바 없는 녀석이었다. 그저 꾸역꾸역 수능 보고, 원서 넣고, 추가 합격까지 기다려 명문대에 진학했다는 것이 혁수와의 작은 차이랄까. 건축학과라서 5학년, 그리고 중간의 어학연수 1년을 보냈지만, 졸업 작품이니 뭐니 하면서도 끝끝내 취업 시장에선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그가 혁수를 붙들고 하소연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혁수가 너무 쉽고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서이지 그가 절대적으로 느린 것은 아니었다.
찬성이가 처음 혁수를 붙들고 시비를 걸던 날이 생생하다. 고등학교 첫 중간고사의 성적이 나온 날이었다. 나는 그저 중학교 때에 비해 크고 내용이 빼곡한 성적표가 신기했다. 꼼꼼히 내용을 읽어보았는데, 중학교 때와 비슷하게 고만고만한 성적이라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아쉬워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렸는데, 혁수는 내용에는 관심 없다는 듯 성적표를 한 번 앞뒤로 훑어보더니 이내 반으로 잘 접어 서랍 속에 밀어 넣었다. 그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성적표를 쳐다보던 찬성이 고개도 들지 않고 입을 열었다.
“성적 잘 나왔냐?”
“뭐 그럭저럭.” 혁수가 남의 이야기하듯 대꾸했다.
“어디 한 번 보자.”
“뭘 남의 성적표를 봐.”
“아~ 왜, 한 번 보여줘 봐.” 찬성은 크게 저항하지 않는 혁수의 서랍에서 성적표를 꺼내 들었다. 눈 앞에 적힌 혁수의 성적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아, 나도 마킹만 제대로 했으면 안 졌을 텐데. 좋겠다. 신혁수.” 그 날이 시작이었다. 시원시원한 성격에 장난만 치는 것 같던 혁수가 자신보다 성적이 좋다는 것을 확인 한 이후엔 말끝마다 '넌 똑똑해서 좋겠다'가 붙었다. 가끔은 '난 머리가 나빠서'도 연달아 튀어나왔는데, 반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힐 성적을 갖고도 그러고 있는 찬성이가 얄밉기도 했다. 반에서 중간을 겨우 오르락 내리락하는 내 성적은 첫날 그의 관심을 벗어났다. 그리고, 내가 늘 그보다 뒤에 있다는 사실도 같이 잊혀졌다.
"아 그럼 그냥 때려치워. 그렇게 욕할 거면 뭐하러 붙어있어?"
"또 말 같잖은 소리한다. 인마 내가 여길 때려치우면 난 뭐 먹고 사냐?"
"그거야 니 일이지. 내가 어떻게 아냐."
찬성이와 혁수는 오늘도 똑같은 레퍼토리로 지껄이고 있다. 대충 어림 잡아도 11년은 저러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 11년간 항상 그 사이에 앉아 최대한 한심하게 그들을 쳐다봤다. 아니 최소한 그랬다고 믿고 싶다. 저기서 세 마디쯤 더 주고받으면 화제를 전환시키고 싶어 진 혁수가 나를 쳐다볼 거다. 이건 11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어김없이…
"진규 넌 요새 준비는 잘 돼가?" 녀석이 한 템포 빨랐다. 한심하다는 표정 그대로 '그만 좀 애들처럼 굴어'라고 선수 치려했는데, 2마디 만에 끊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준비랄게 있나.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니고. 올해도 쉽진 않겠지. 아, 나도 참 지겹다 지겨워."
"아 이 새끼, 사람 말하는데 끊고 지랄이야. 인마 너도 회사 좆같잖아."
"야 인마, 니 이야기만 하지 말고 진규 얘기도 좀 듣고 해라. 애가 아까부터 조용히 앉아만 있잖아. 친구라는 놈이 지 얘기만 바빠가지고. 인마 지금 니 푸념이 전국 수백만 취준생들 앞에선 사치라고 사치. 합격하기 전까진 바들바들 떨면서 붙여만 주면 평생 충성을 다하겠다더니, 몇 년이나 있었다고 그 난리야."
여기서부터는 5년 전쯤 생긴 패턴인데, 말년 병장이던 찬성이가 국방부 시계를 입으로 돌릴 심산이었던지 휴가만 나오면 혁수를 붙들고 온갖 신세 한탄에 하소연을 퍼붓는 통에 새롭게 생긴 패턴이었다. 막 상병을 달고 정기 휴가를 나왔다가 마주한 이 새로운 패턴에 나는 드디어 둘이 한 판 붙는 건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조용히 둘을 쳐다보고 있었었다. 볼 때마다 신기한 건 혁수의 잔소리가 늘면 늘수록 찬성의 입은 굳게 닫혀갔다. 그리고 오늘도 같은 패턴으로 찬성이 입을 다물자 우리는 자리를 파하고 일어났다.
"어우. 야, 벌써 날이 추워진다." 가게를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찬성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언제 티격 댔냐는 듯 혁수가 말을 받았다.
"그러게, 무슨 날씨가 이래. 지난주까지 그렇게 덥더니 갑자기 확 추워지네."
"요새도 낮엔 더워. 오늘도 도서관 가는데 덥더라."
"그래? 하루 종일 사무실에만 있었더니 하루 날씨란 게 아침, 저녁 기온 밖에 없네."
"바람도 좀 쐬고 해라. 그러다 건강 버릴라." 짐짓 걱정해주는 척 하며 가방에서 카디건을 꺼내 입으며 인사를 건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