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집에는 불이 다 꺼져있다. 차라리 이게 편하다. 혁수랑 찬성이를 만나고 왔다고 하면 한소리 하실 게 분명했다. 조용히 방에 불을 켜고 옷을 갈아입은 뒤 간단하게 세수를 한다. 재수할 때 친구들과 놀고 들어와 늦은 밤에 샤워한 것 때문에 다음날 크게 한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집에 불이 꺼진 뒤 들어오면 간단한 세수로 하루를 마감하곤 했다. 그나마 날이 추워진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잠자리에 누웠는데, 약속 나가기 전에 쓰다만 자소서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고양이 울음 소리와 함께 밀려오는 바람이 스산해 창문을 밀어 닫고 이불을 끌어올린 채 머리맡에 두었던 휴대전화를 집었다. 찬성이 녀석이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속 우리는 오늘도 신나게 웃고 있었다. 언제 저렇게 웃었지? 좋아요를 누르고 페이지를 스크롤했다. 이내 조금 전 집에 들어오는 길에 봤던 동영상이 나왔다. 몇 번 새로고침을 해보지만 더 이상 올라오는 소식이 없었다. 오늘도 긴 밤이 이어지리라 생각하며 휴대전화를 머리맡에 올려두고 눈을 감았다.
"얘~ 진규야~ 진규야! 일어나서 밥 먹어라~"
정신을 차리니 어머니의 조금은 격앙된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몇 시지?' 좀체 짜증을 안 내시는 어머닌데, 오늘 따라 톤이 높은 것 같아 재빨리 시계를 확인해보니 7시 43분이었다. '아뿔싸.' "네~ 갈게요." 일단 크게 소리 지르고 부랴부랴 몸을 일으켜 식탁으로 향했다. 잠이 덜 깬 건지 정신이 없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식탁에 앉아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께 번갈아 인사하며 급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물을 들이켰다.
"너 지금이 몇 시냐? 남들은 다 출근한다고 바쁘게 움직이는 시간에 넌 무슨 팔자가 좋아 그렇게 늘어져 있어?" 아버지는 잘 잤냐는 말을 잔소리로 대신하셨다. 시계를 확인했을 때 이미 예상한 상황이지만 역시 아침부터 밥맛이 싹 달아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조용히 숟가락은 들었다. 이런 날엔 평소처럼 젓가락으로 밥을 먹다간 또 잔소리가 날아올게 분명했다. 숟가락으로 밥을 듬뿍 떠서 입에 밀어 넣고, 반찬들도 평소에 잘 집지 않았던 것 위주로 골고루 집어 입에 밀어 넣었다. 너무 급해서도 안되지만, 먼저 식사를 시작하신 아버지보다 너무 늦어져서도 곤란했다. 부지런히 밥을 입에 우겨 넣는데, 예상에도 없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귓전을 때렸다.
"너도 이제 아르바이트 같은 거라도 해서 니 손으로 용돈이라도 좀 벌던지 해라. 졸업한지도 한참인데 언제까지 용돈 받아다가 술이나 마시고 다닐 거냐."
"예? 아, 아니 아버지 제가 뭘 그렇게 술을 마시고 다녔다고 그러세요? 그리고 이제 막 하반기 취업 시즌이라 아르바이트할 시간도 없어요."
"다른 애들은 대학교 들어가면서부터 자기 손으로 벌면서 대학도 다니고 준비 다 해서 취업도 다 하는데, 넌 학교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맨날 방구석에서 놀거나 친구들 만나서 놀면서 무슨 시간이 없다는 거야. 어영부영 집에서 또 뒹굴거릴 생각 말고 용돈 벌이라도 좀 알아봐."
"여보 그러다 회사 늦겠어. 나중에 저녁에나 다시 이야기하고 어서 식사해요."
"저녁에 집에 붙어 있어야 말이지. 아무튼 다음달부턴 용돈 없다 생각하고 부지런히 알아봐."
아침부터 대형 폭탄을 맞은 기분이었다. 부지런히 살다 하루 늦잠을 자면 꼭 잔소리를 들었다. 그까진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아르바이트를 찾으라니. 당장 이번 주까지 내야 할 원서가 3곳에 다음 주면 본격적인 하반기 취업 시장이 시작될게 분명했다. 평소에도 일방적이긴 하셨지만, 이건 좀 당황스러웠다. 당장 말도 안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심기를 건드려서야 승산이 없었다. 어지간히 기분이 좋아지시지 않는다면 실제로 용돈을 끊으실 게 분명했다. 새삼 부모님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았구나 하는걸 깨닫지만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통장 잔고를 확인해 보니 잔액은 23만 원 언저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나마 보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올해 취업을 하더라도 절대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는 액수는 아니었다. 결국 단기 알바라도 찾아야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