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조금 늦잠을 잤다고, 도서관에는 빈 자리를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두어 바퀴를 돌아 겨우 빈자리를 찾았는데, 가방을 치워주는 여자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한 사람당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게 눈총 받을만한 일인가 싶었다. 가방을 두고 음료 한 잔 사러 나가는데, 괜스레 어제 나를 앞에 앉혀놓고 신세 한탄을 하던 녀석들이 미워졌다. 두 놈 다 사무실에 앉아 편한 마음으로 자판이나 두드리고 있을 텐데, 난 오늘 아침부터 아버지에서 시작해 처음 본 여자에게까지 부지런히 눈총을 받는구나 싶었다. 부정적인 생각들을 걷어내자 한숨이 나왔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벤치 끝에 자리 잡고 앉았는데, 현식이가 멀리서 손을 흔들고 꾸벅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형. 일찍 나오셨네요.”
“어. 그래. 이제 오는 거야?”
“아뇨, 새벽에 와서 자리 맡아두고 요 앞에서 아침 먹고 왔어요.”
“너도 참 부지런히 산다.”
“가진 게 없으면 부지런히라도 살아야죠. 그래도 잘 된다는 보장도 없지만요.”
“넌 좋은 데 갈 거야.”
“그러면 좋겠네요. 아... 형도 올핸 좋은데 꼭 들어가실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다.”
“그럼 전 먼저 들어가 볼게요.”
“어 그래.”
그렇게 도서관으로 들어가던 현식을 보다 오랜만에 그와 점심을 먹을까 하고 그를 다시 불렀다.
“현식아.”
“네?” 막 도서관 입구를 향하던 그가 무슨 일이냐며 돌아섰다.
“점심에 약속 있어?”
“아뇨.”
“그럼 나중에 점심 같이 먹자.”
“아, 네. 언제쯤 드실 거예요?”
“뭐 한 12시쯤 나가면 되지 않을까?”
“네, 그럼 식사하실 때 연락 주세요.”
“어 그래. 그럼 수고하고~”
현식을 처음 만난 것은 과 오리엔테이션에서였다. 졸업반으로서의 패기와 신입생으로서의 주눅이 교차하는 자리였다. 백여 명이 넘는 동기들은 각자 설레는 모습으로 옆자리의 인연들과 인사를 나누거나 약간의 기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여기까지 닿는데 남들보다 한 해가 더 걸렸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나는 강당의 오른쪽 끝의 자리에 앉아 조용히 동기가 될 녀석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아직 겨울이 한창임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딱 맞춰 등장한 현식은 나에게 실례한다며 말을 건넸다. 때마침 선배로 보이는 일군의 무리가 무대 앞쪽에 나와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시작하려 했기에 나는 조용히 무릎을 안쪽으로 틀어 길을 터주며 그와 가벼운 목례만을 나눴다. 한 칸을 띄워 자리한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억지로 내려 누른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이전에 무슨 이야기가 있었나요?”
“네? 아, 아뇨.”
“이제 막 시작한 건가요?”
“네.”
“휴~”
지금 생각해도 그의 그 '휴~'가 입으로 낸 소리였는지 뱃속 깊숙한 곳에서 밀려나온 공기의 울림이었는지 헷갈린다. 처음 그를 봤을 때는 어지간히 허둥대는 친구이려니 했었다. 첫날부터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모습이 앞으로의 그의 생활을 미리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그는 그 이후로도 계절에 상관없이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니기 일수였다. 그렇다고 덤벙대거나 얼을 빼놓고 사는 친구는 아니었다. 오히려 가끔 보면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빠릿빠릿하게 일들을 처리해나가는데, 어지간해선 빈틈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대학부터 독립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온 덕분에 하루를 부지런히 쪼개서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것이었다.
도서관 입구로 빨려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새삼 그와 이렇게 쉽게 점심 약속을 잡은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아르바이트가 없나? 하는 생각을 하다 다시 당장 아르바이트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군 입대를 전후해서도 아르바이트라곤 해본 적이 없었다. 그 흔한 단기 알바 한 번 없이, 돈이 필요하면 집에 손을 벌리는 것이 꽤 익숙했다. 살아오면서 내 손으로 돈을 벌었던 기억은 억지로 간 군대에서 월마다 몇 만원씩 선심 쓰듯 통장에 넣어 준 것이 전부였다. 어쩌면 아버지의 일갈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너무 갑작스러웠을 뿐이다. 깨달음과 부정 사이를 오가다 대상을 찾지 못한 짜증이 치밀어 그냥 다 미뤄두기로 하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치워줬던 여자는 내가 돌아오자 다시 한 번 눈을 흘겼다. 이런 날은 저런 사소한 행동마저 눈에 거슬린다. 하지만 내가 굴러들어 온 돌인 이상 같이 눈싸움을 할 수는 없었다. 조용히 가방에서 S 그룹 인적성 검사 대비를 위한 문제집을 꺼내 마지막으로 본 페이지를 펼쳤다. 책을 펼칠 때마다 하는 생각이지만 도대체 이딴 문제들로 사람을 판단하겠다는 대기업의 인사 정책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나야 공대생이니까 뭐 필요한 수리적 문제들은 풀어야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매번 서류만 보는 문과생들이 도대체 공간지각 능력이 높아야 하는 이유는 뭘까. 사무실 책상 배치도라도 그려야 한다는 건가 뭔가. 그나마 이런 문제 같은 문제들은 이해라도 간다. 성격검사지 같은 답을 알 수 없는 문항들은 도대체 뭐에 써먹는지 상상도 가질 않았다.
한참 그런 생각을 하며 문제들을 쳐다보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책에 코를 박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이럴 때 너무 놀라며 일어나면 오히려 옆 사람에게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대학 4년을 다니며 배운 것은 이런 쓸데없는 도서관 상식 따위였다. 잠시 내가 코를 골진 않았던가 생각하며 슬며시 고개를 드는데, 이미 옆자리에서 눈을 흘기던 여학생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비운 뒤였다. 서둘러 시간을 확인하니 12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아뿔싸. 급하게 현식에게 전화를 걸며 열람실을 나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