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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연산 Jun 17. 2019

자기소개의 애매함

"자기소개 한 번 부탁드립니다"

 으레 어딜 가서든 자기소개를 할 일이 종종 생기기 마련이다. 보통 나의 소속과 나이, 이름을 말하면 끝이 나는 싱거운 자기소개지만, 가끔씩 자기소개를 하기 난처할 때가 있다. 어느 학교의/어느 회사의 어딘가에 소속된 누구입니다.라고 말하기 어려울 때가 그렇고, 다들 자신에게 쏟는 시선을 빠르게 넘기기 위해 읊는, 준비된 자기소개 말고 내가 하고 싶은 자기소개를 하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그렇다. 전자는 이제 곧 적을 둔 곳이 없어질 터라 걱정된다. 지금이야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는 어느 학교 어느 학과의 누구입니다,라고 무던한 자기소개를 할 수 있지만 나는 이제 두 달 반 후에는 공식 백수다. 사실 대학은 인즉 졸업했어야 할 나이인데, 그 사이의 나이에 채워 넣은 여러 경험들로 나를 소개해 보려 해도 뭔가 어정쩡한 기분이 드는 것도 어쩌기 어렵다. 


 언제부턴가 자기소개라는 게 굉장히 애매해졌다. 자기소개란 게 나를 구성하는 요소에 대해 말해야 하는 건지,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말해야 하는 건지, 내가 속한 집단의 교집합을 말해야 하는 건지, 인간관계를 말해야 할 것인지 등등에 대해 생각을 하다 보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가끔은 <물어보는 사람도 사실 별로 들을 생각이 없어 보이고 하는 사람도 별로 달갑지 않아 보이는 이 자기소개라는 걸 굳이 왜 하는 거야>라는 생각까지 미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모든 사람이 만나는 모든 이와 충분한 시간을 함께하며 이 사람이 어떻구나에 대해 결을 느끼며 쌓아나갈 수는 없으니, 일단 기본적인 정보가 필요하든, 하다못해 처음 만나 어색한 시간을 어정쩡한 어색함으로 남기더라도 자기소개가 필요하기는 하겠지, 하고 마지못해 납득한다.


 나는 분야별로 나누어서 자기소개를 해봐도 어색하고 애매하다. 저는 어디 대학교 어느 과의 몇 살 김혜성입니다. 음. 너무 심심해.  생활예술인 김혜성입니다. 그래. 이건 일단 뱉고 나면 기분은 좋다. 문제는 이러고 나면 내가 지금까지 발가락만 퐁당퐁당 담갔다 뺀 음악과 그림과 뮤지컬 등등의 오만 잡 거리를 꺼내 좌판에 늘어놓듯 늘어놔야 한다. 지질해 보여 싫을뿐더러, 꼭 저렇게 한 번쯤은 소개를 해보고 싶다는 진심보다 <아.. 저는 이것도 해봤고요, 저것도 해봤고요..> 하는 말을 주섬주섬 꺼내며 감당해야 할 쪽팔림이 아직 더 크다. 또, 대학 생활의 끝물 직전에 들은 교양수업에서 낸 자기소개 과제에서는 정말 정신줄을 놓아 버리고는 <나는 남들이 본 이미지의 총합일 수도 있고,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의 총합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누군가가 쌓아 올린 이미지,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입니다..>라는 소위 말하는 쌉소리를 수정도 안 한 채 써 제출했던 일도 있다. 골자는, 어떻게 해도 자기소개는 내게 참 어렵고 애매한 일이다.


 내세울 게 없고 하고 싶은 것도 별로 없는 나는 이제 곧 취업전선이라는,  더럽게 상투적이지만 진실된 표현에 빠져 살아야 한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나도 잘 모르는 나에 대해 소개하는 글을 써서 기업의 인사담당자에게 보여줘야 한다. 나는 저녁에 뭘 먹고 싶은지도 헷갈리고 신메뉴가 맛있어 보인다며 햄버거를 시켜놓고 반 먹고 이건 맛대가리가 없잖아..  하고 우거지상을 짓는 내가, 정말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소개해야 한다니. 내가 지금 물이 마시고 싶은 건지 배가 아픈 건지 고픈 건지도 헷갈리는 내게 자기소개란 건 너무 가혹하다. 누가 혜성씨 성격은 어때요?라고 물어보면 아마 <누구한테는 지랄맞아서 개같고요 누구한테는 차분하고 침착하답니다> 라며 웃으며 얘기할 수 있겠고,  나는 아마 미친 사람이 되겠다. 


 아무래도 나에 대한 확신이라는 게 썩 들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다. 나도 확실하지 않은 것을 나의 무언가를, 구성품을 포장해서 남 앞에 내놓으려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고, 그래서 그냥 남들이 굳이 딴지를 걸지 않을 얘기만 하는 게 아닐까. 내가 어느 학교의 어느 과라는 사실이 나에 대해 많은 걸 드러내지는 않으니까. 나보고 나의 과의 전공에 대해 잘하겠다고 말해주면 속으로  <그거 재수강 세 번 하고 교수님한테 죽여주세요 살려주세요 둘 중에 하나만 해주세요 하고 C를 맞았구요, 점수 맞춰 온 대학에 과에요. 전 이 과가 아직도 생소해요> 라고 대꾸하고, 겉으로는 <아 네 그냥 적당히 해요>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내가 좋고 싫은 걸로 나를 소개하라고 하면 <랩 좋아하고 랩 오래 했어요. 뮤지컬도 해봤구요, 음악, 영화 듣고 보는 것 많이 좋아합니다. 글 쓰는 것도 좋아하고요. 그런데 사실 이 중 하나라도 밥 벌어먹을 만큼 특출나게 잘하는 건 없어요>라고 할 터이다.


 그렇게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불확실성만 잔뜩 구겨 안고 나는 자기소개서를 끼적이고 새로운 사람 앞에서 무던한 나를 소개한다. 

   


 자기소개는 내게 너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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