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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연산 Dec 13. 2021

잘 못 지내지만 뚝딱이며 삽니다

정말로요

잘 못 지내는데 잘 지내려고 노력 중이다. 상담은 12회기에 접어들었다. 상담사는 내가 조금 긍정적으로 바뀌었댔다. 좋다. 병원도 바꿨다. 약도 바꿨다. 이젠 머릿속이 안개가 낀 기분이 들지 않는다. 잠을 자는 시간은 줄었다. 하지만 억지로 잠에 들었다가 겨우 깨어 한 시간 동안 꿈과 현실의 경계선을 헤매는 일은 사라졌다. 전에 병원은 환자를 1분 넘게 본 일이 없는데 지금 의사는 최소 3분은 봐준다. 시간을 뺏을까 무서워, 얼른 다른 환자를 보려고 날 쫓아낼까 무서워  약을 먹고 나서 바뀐 점을 메모장에 정리해  와르르 쏟아냈던 내가 괜히 민망해질 만큼 의사는 친절하다.


바뀐 약의 장점은 아주 좋지만 단점도 있다. 음식을 먹는 게 고역이고 배가 고파도 식욕이 돌지 않는다. 결국 몸무게가 41.4kg가 되었다. 그래도 군살은 없으니 이대로 운동하면서 찌면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진짜. 내가 전보단 긍정적이라고 한 상담쌤 말이 맞긴 한가보다.


약이 좋다고 어필을 강하게 했더니 의사가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진 않겠어요' 라며  약의 용량을 줄였다. 난 전의 의사가 부작용을 호소해도 약을 바꿔주지 않던 일이 생각나서 괜히 쓴웃음이 났다. 전에 먹던 약은 반년, 머릿속이 안개도 아니고 연기가 자욱했던 기분이라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조절한 약은 괜찮은 것 같다. 부작용을 들은 의사는 내가 약물에 민감한 편인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도 알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약은 잘 챙겨 먹고 있다.


5년 전 좋아하던 애가 운동을 다니자고 해서 수영을 다니기 시작했다. 강습에 나갈 때마다 복잡 미묘한 기분이 든다. 어차피 날 절대 좋아하지 않을 애를, 애인도 있는 애가 다니잔다고 덜컥 간 내가 웃기다. 수업받는 반이 다르고 난 눈이 안 좋아서 걔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걔는 내가 어디 있는지 보인다던데. 뭐 여하튼. 수영이 끝나면 같이 밥을 먹거나 하며 놀고 있다. 와중에 나는 부정적인 사람이라고 자꾸 나한테  한 마디씩 한다. 나 스스로 느끼기엔 꽤 나아졌는데. 자기 애인은 아주아주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뭐지 이거 비교하는 건가. 괜히 한숨이 나오려는 걸 열심히 참는다. 이 바보짓을 하는 와중에도 수영은 정말 재밌어서 좀 놀랐다.


혼자 자유수영을 나가 봤다. 아직 뭘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걷다가, 뒷사람에게 추월당하거나, 물을 먹고 꼬로록거린 게 다였지만 내가 남의 기대나 약속 없이 나간다는 건 내게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걸 알기에 괜히 좀 뿌듯하다. 오늘은 팔돌리기를 배웠는데 내일 몸 상태가 나쁘지 않으면 오후에 나가서 연습을 할까 한다.


감히 예상하건대 뭐든(사람을 포함해..아님 나한테만 그런가) 쉽게 흥미를 잃는 걔는 아마 멀다는 이유로 수영을 관둘 것이고, 나는 계속 다닐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피가 마른다. 좋아했던 사람으로 묻어뒀던 사람이 다시 내 현생에 끼어들어 하루의 순간은 즐거울지 몰라도 나머지 시간이 괴롭다. 이 시간에 걔는 애인이랑 있겠지, 나는 방바닥이나 긁고 있는데. 이런 상상은 겹칠수록 현생에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주말엔 좋아하는 작가님의 글을 읽고 나의 심연을 들여다봐야겠다고 했으나 막상 내가 들여다본 건 이미 너무 많이 봐서 대사를 외울만큼 닳고 닳은 드라마와 만화였다. 괜히 무섭다. 30살이 보름 남짓 남은 지금 누구 하나 사랑은 커녕 연애도 못 하고 여기까지 왔다는 게 조바심이 나서. 그러니까, 나는 걔랑 아마 좀 떨어져 있어야 할 것 같다. 오늘은 핸드폰에 남은 통화기록이나 사진만 애꿏게 지워댔다.


오늘은 미루고 미루던 입사지원서를 하나 썼다.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뭔가 시도했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려고 하는 중이다. 이번 달에는 짧은 영상 공모전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2년여 전에나 했던 영상편집을 다시 해보려니 뚝딱거리는 내 모습이 벌써 선하다. 어쩔 수 없긴 하다. 당선이랑 상금이 너무 멀지 않게 느껴지는 공모전이라서 약간 욕심이 났다. 신기하다. 전엔 욕심이나 뭔갈 하고 싶다는 마음이 없었다. 생겨도 당연히 안 될 거니까 안 해야지, 했는데. 이번엔 그런 마음이 들면서도 꾸역꾸역 하겠다고 했다.  


다니던 알바는 결국 연장계약 없이 끝이 났다. 통장엔 80만원이 남았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만년필을 한 자루 샀다. 가지고 다니던 건 다 남 줘 버려서. 또 같잖은 핑계로 남에게 짧은 환심을 사고자 선물하는 일을 없애고 싶어 내 이름을 각인했다. 그림을 다시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이번주 내엔 오겠지. 다시 그림을 그려야겠다.


아. 춤 학원도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다 내리막길에서 튕겨 나간 이후, 아픔과 이런저런 핑계로 한 달 가까이 쉬었는데 학원 원장이 나를 회식에 초대했다. 지인 가게 매출을 올려주려는 얄팍한 셈이 아닐까 하는 걱정으로(실제로 그런 학원에 다녀봤었기에) 나가봤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자리는 재밌었다. 와중에 원장님을 말 한마디로 울려 버렸다. 그냥 칭찬 한마디 해 드렸는데 우는 제스처를 취하시는 거다. 리액션이 큰 분이네, 했는데 거의 흐느끼듯 우는 원장님을 보고 뭔가 잘못한 줄 알았다. 원래 울음이 많으신가. 감동을 쉽게 잘 받으시는 분인가. 억양도 어조도 없고 표정도 없는 내가 한 말이 그렇게 충격..이었나. 나중에 듣자 하니 원장님이 우는 걸 본 건 9년만에 처음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니 그럼 그걸 내가 해낸건가. 자리가 늦어졌을 때 원장은 내게 말을 진실성 있게 한댔나.. 하는 칭찬을 건네셨다. 감사했다. 2월에 하는 공연도 함께하자 하셨다. 이젠 뭐 뺄 수도 없고, 그냥 나가야 한다. 기대됨과 동시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이 기분 되게 오랜만이다. 아직까진 그렇게 나쁘진 않다.


여하튼 잘 지내려고 노력 중이다. 사실 41.4kg라는 수치는 몸무게 하나로 국한하기 어려운 수치다. 항상 피곤하고, 뻐근하고, 예민하고, 짜증 많고, 그와 동시에 하려는 일엔 둔하고 소화가 안 된다. 그런 수치들의 종합이 41.4다. 그 와중에도 누군가에게 감동을 줄 수 있고, 수영을 다니면서 살이 붙으면 난 좀 멋져질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든 건 꽤 괜찮다. 별 고생 없이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게 살아갔으면 좋겠지만, 감정기복과 방바닥을 긁으며 질투와 자괴감에 늪에 한 발씩 담그지 않고 지내면 참 좋겠지만 아직까진 무리다.


다만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살아간다. 난 긍정적인 사람이 될거야! 도 없고, 그냥 있는 그대로. 예전에 상담시설에서 근무할 때, 수련을 온 선생님에게 여쭤보니 자아 탄력성이랬나 하는 건 공 같은 거랬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얼마나 튕겨오를 수 있는지에 대한 거라고. 나는 지금껏 쇠나 돌로 만들어진 공이었다. 그래도 이젠 골프공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골프공을 그냥 떨어뜨려 보면 아주 살짝, 바닥에서 튕기긴 하니까. 언젠간 뽑기에서 뽑는 탱탱볼이 되길 바란다. 행복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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