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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연산 Oct 14. 2021

그냥 쓰는 글

별일 없이 살고요

사는 게 별 게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냥. 며칠 전에 괜히 심심해서 클럽하우스를 켰다. 별 내실 없어 보이는 방들을 구경하다 어느 방에 들어갔다. 사람의 목소리를 백색소음삼아 일기나 쓸 생각이었다. 막상 방에 들어가자마자 관리자가 내게 스피커로 올라올거냐고 물었다. 별 생각 없이 그렇게 했다. 올라가서 인사만 하고 입 다물고 있지 뭐. 뭘 하고 있었냐고 묻기에 일기를 쓰고 있었다고 했다.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엥. 일기 쓰는 게 뭐 별 거라고. 답정너 아니다. 자신도 일기를 쓴다는 간증(?)이 몇 분의 입에서 나왔다. 관리자는 내가 말하기에 앞서 그 사람들이 일기를 쓰는 이유와 의미에 대해 물었다. 왠지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일기를 쓴다고 하자 이미 '글쓰기에 도움이 되며 감정을 정리하고 감사한 일을 적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미있는 일' 을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니. 허미. 난 아닌데.나라고 더 특별한 이유가 있냐고. 전혀. 


 난..뭐가 없는데


어떤 분은 감사 일기를 매일 적고 있다고 하셨다. 속으로 대단하다 생각했다. 난 별로 감사한 일은 없는데. 퇴근하다가 차에 안 치어서 감사하...압니다? 최근에 병원 가니까 녹내장 걱정은 아직 필요 없다는데, 감사합니...다아? 잘 모르겠다. 또다른 분은 하루를 정리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일종의 수양같다고 하셨다. 이쯤 되니 슬슬 쫄렸다. 난..뭐가 없는데. 내 차례는 속절없이 결국 왔다. 혜성님은 왜 일기를 쓰시나요?


'전 그냥 쓰는데요...'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겸손하다는 이야기를 듣고자 한 게 아니었기에 바로 말을 이었다. 전 진짜 별 게 없어요. 그냥 써요. 한 줄 읽어드릴게요. 아. 머리감기 싫다. 아 그런데 찝찝한데. 감을까. 내일 아침에 감을까. 귀찮아 죽겠다. 이발도 해야되는데. 쨔쟌. 이게 내 일기의 서문이며 본문이다. 결말일 때도 있고. 별 게 없다. 자. 일단 말은 뱉었다.그런데 뭔가 마무리를 잘 해야 할 것 같았다. 다들 일기의 순기능에 대해 간증을 했는데 나만..별 게 없으면 좀 허무하니까. 그래서 "이러다 보면 하루의 잡다한 일들을 적고, 그때 느꼈던 감정을 글로 정리할 수 있어요." 하고 말을 맺었다. 아주 조금 사실이기도 하지만 보통 내 일기는 별 알맹이가 없다. 또 뭘 쓰냐면. 고구마 먹기 귀찮다. 하루 네 끼를 다 챙겨먹으려니 생각보다 번거롭고 귀찮다. 오늘은 스쿼트 90개를 했다. 뭐 이딴 말 천지다. 의미 없는 내 일상이나 단상이 적힌 경우가 대부분이다.


굳이 의미를 따지자면 우울과 비탄, 슬픔을 눅눅하게 적셔가던 일기장이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일상으로 변했다는 데엔 의미가 있겠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방학에 몰아 쓰던 일기를 제외하고,(심지어 이 즈음의 일기는 재밌는 점이 있는데, 같은 날 누구는 맑음이라고, 누구는 비가 왔다고 한다. 항상 즐거웠다고 한다.지금은 보통 항상 빡쳐 있다는 게 다르다) 스물이 넘어 적기 시작한 일기는 처음엔 어둑하고 찐덕거렸다. 우울에 절일 대로 절여진 일기장을 며칠 전 짐 정리를 하다 발견했는데, 차마 펼쳐볼 용기도 버릴 용기도 없어 그냥 두었다. 


신발 상자 정도 크기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바나나 박스만해서  놀랐다. 아, 내가 우울하고 슬펐던 시절의 기록만 이만한 박스 하나구나. 와중에 시꺼먼 표지에도, 흰 표지에도, 노란 오리가 그려진 귀여운 공책에도 우울만 꽉꽉 들어차 있을 걸 알아서 좀 우스웠다. 이제는 좀 웃픈 이야기구나 할 수 있으니, 그래 나름 의미가 있긴 한가.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처럼, 나는 요새 인생에 있어 가장 별일 없이 산다. 그래서 특별히 기쁠 일도 없고 특별히 슬플 일도 없다. 약을 먹고 상담을 다닌다. 하지만 그런다고 세상이 마구마구 환해지진 않았다. 그냥 덜 어둑해졌을 뿐이다. 사실 일기 역시 우울증에서 나아 가는 과정도, 결과도 아니다. 일기는 그냥 매일의 기록일 뿐이다. 미치기 싫어 적기 시작했던 것뿐이다. 죽기 싫어 죽고 싶단 말을 적던 게 점점 옅어져 '아 머리 감기 귀찮다' 정도로 바뀐 거다.  


난 삶에 있어 특별한 사명감이나 열정은 딱히 없다. 호불호는 있지만 죽도록 뭐가 하고 싶거나 죽을 만큼 싫은 것도 별로 없다. 세상에 한번 난 거 뭐라도 대단한 걸 해내야 해, 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난 그냥 필부의 삶으로 족하다. 어느 누구도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삶에 불변할 만한 진리가 있을 만한 게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서. 허무주의자는 아니다. 비관주의자도 (이젠) 아니다. 그냥 담담히 지금 살아있고, 살아 있는 거면 되었다 정도 믿는 인간이 되었다. 


이번주에 바라는 건 약 부작용이 조금만 덜 하면 좋겠다는 것뿐이다. 이번에 바꾼 약은 뭔가 인위적이고 기시감이 드는 의욕과 활동성을 가져다주었다. 내 의지에 몸이란 인형을 실로 연결해 움직일 수 있는 느낌이다. 전엔 그 실이 없었고. 그 대신 소화불량과 메스꺼움, 식욕부진을 한스푼씩 줬다. 어제는 살을 찌우려고 라면을 먹는데 고무줄을 씹는 기분이었다. 뇌에 안개가 옅게 낀 느낌도 들고. 그런데 이 모든 단점을 장점이 나름 상쇄하고 있으니, 부작용이 덜해지길 바랄 뿐. 그냥 그 정도만. 


나는 아마 위대한 인간은 되지 못할 것이다. 수많은 경조사 중 하나로 기억될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몇몇 사람들에겐 잊혀질 것이고 몇몇 사람에겐 이런저런 모습으로 흐릿하거나 약간 선명하게 기억될 것이다. 세상은 그냥 산다. 태어난 김에 사는 인생도 뭐 썩 나쁘진 않다.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은 하면서 산다. 나를 가꾸기 위해 세수를 하고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일을 하고. 짬을 내어 운동을 한다. 다만 큰 의미부여는 하지 않으려 한다. 20대 초중반까진 모든 일에 의미가 있다 믿었다. 의도와 의미. 무언가 대단한 것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힙합으로 치면 투팍같은 전설이 되고 싶었고, 화가라면 고흐같이 불 같은 열정을 뽐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랩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꽤 오랜 기간 절망했던 걸로 기억한다. 애매한 재능, 겁먹어 하지 않은 노력 등에 나를 채찍질했지만 그만큼 돌맹이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돌고 돌아, 그냥의 상태에 이르렀다. 경지도 아니고 그냥, 그냥의 상태. '그냥 하고, 그냥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그런데 뭐, 요새는 의미없고 기억되지 않을 돌맹이라도 나만 괜찮으면 뭐 좋다.


그래서 그냥 쓴다. 별일 없이 쓰고 별일 없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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