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못 지냅니다
담당의를 세 달만에 만났다. 잘 지냈냐기에 잘 못 지냈다고 했다. 면접에 떨어졌고, 들어가려던 무용단이 지원사업을 받지 못해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서울에 집을 구하려고 돌았지만 반지하 말고는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얘기를 담담한 억양만 써서 쏟아붓곤 잠이 안 온다고, 잠이 오는 약을 더 받을 수 있냐 물었다. 의사는 딱 잘라 거절했다. 혜성씨는 지금 약이 필요한 게 아니라고. 평소에 춤을 추던 사람이 춤도 안 추고 집에만 있으니까 당연히 잠이 안 올수밖에 없다고. 춤 많이 추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도움이 안 되어도 좋으니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해 보라고. 도피여도 좋으니 약이 먹고 싶습니다, 라고 할 뻔했는데 잘 참았다.
5주치 약을 받았다. 통장잔고를 보니 이제 10만원이 채 남지 않았다. 다음 달 통신비와 보험,교통비로 모두 사라질 돈이다. 실질적으로는 돈이 한 푼도 없는 셈이다. 약과 병원비를 합치면 하루에 1000원꼴이고, 다녀오는 시간은 한 대기시간을 포함해 두시간 반쯤 걸린다. 하루에 1000원으로 무너지지 않는 정신을 가질 수 있는 게 어디인가 싶기도 해 그냥 그런가보다 하기로 했다. 시간도 뭐. 하루에 10분 정도 썼다고 하면 괜찮다.
알바를 구했다. 별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서른 살이 되도록 포스기를 쓸 줄 모르는 사람을 써 주는 곳은 많지 않았기에 아는 형이 운영하는 술집에 주말마다 가서 일을 하기로 했다. 형 그래서 내가 뭘 해야 돼? 라고 묻자 사람들 오면 인사 하고, 분위기도 띄우고, 춤도 추고 그래. 라고 했다. 나는 몇 년 전의 내가 아니라고 했다. 춤을 예전처럼 신나게 추지도 않고, 사람들과 말하는 능력도 잃었으며, 술도 전만큼 즐기지 않는다 했다. 사장 형은 상관 없다며 일단 해 보라고 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책도 게임도 핸드폰도 모두 재미가 없다. 시기와 질투만 그득히 마음속 곳간에 쌓여가는 기분이다. 엊그제 구독자 수를 보니 좀 줄었다. 신경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꽤 신경이 쓰였다. 무엇도 집중이 잘 되지 않아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지만 어설프기 짝이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아니, 매일을 지나친다. 내가 가지지 못한 친분을 가진 사람들이 부럽고 미워서 견딜 수가 없다. 나는 멀어서 가지 못하는 공연을 아무렇지 않게 가는 사람이 처음엔 부러웠다가 이제는 그 사람이 미워져 버렸다. 그리고는 내가 밉다. 돈이 없는 내가 원망스럽고 저 사람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게 싫다. 질투는 나의 힘이라더니, 기형도 씨. 저는 오늘도 갈 곳 없이 구천을 떠돕니다.
술이 당기는 것도 아니면서 사람이 그리워 칵테일 바에 간다. 술 한 잔을 시키고 두세 시간씩 앉아 있는다. 어쩌다 합류한 2차 자리는 생전 처음 보는 내게 반말을 하는 무례한 사람과 자욱한 담배연기에 한 시간만에 도망쳐 나왔다.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과 사람이 싫은 마음이 공존하니 이 시소에서 둘 중 하나는 내려와야 할 텐데 30년째 이 어설픈 공존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좋은 일 한 숟가락, 안 좋은 일 한 국자, 또 그저 그런 일이 밀물 썰물처럼 오가면 하루가 끝난다. 좋은 일이래야 애써서 만든 '오늘은 운동을 나갔다' 정도지만. 요새는 내가 뭘 해도 스스로 성에 차질 않는다. 내 목표는. 내 통장은. 뭐는. 뭐는. 다 너무나 하잘것없고 모자라 보이는 데다 그게 또 내 생각이 아닌 사실인것만 같아 우울해지곤 한다.
벽에 붙인 포스터는 종종 툭툭 떨어진다. 다시 붙여도 떨어지고, 다시 테이프를 덧대도 떨어진다. 포스터는 사실 너무 크고 테이프는 너무 약해서 그렇다. 괜히 내가 포스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 포스터가 아니라 테이프. 포스터는 일상이고 테이프는 내 엉성한 노력이겠다. 덕지덕지, 툭. 툭.
엊그제는 글을 너무 잘 쓴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너무 고마워 메시지를 캡쳐해 두었다. 하지만 흙탕물에 깨끗한 물 한 방울 넣는다고 물이 맑아질 리 없다. 미묘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구독자가 몇 명 사라졌더라. 신경쓰지 않겠다 했는데 계속 마음이 쓰인다.
책을 몇 권 샀다. 쉬이 남에게 좋아한다고 추천하기 어려운 책이지만 꽤 맘에 들어 야금야금 읽고 있다.
좋아하는 작가님의 사인회에 갈까 말까 하다가 결국 못 갔다. 돈이 없기도 없거니와..가 아니지. 그냥 돈이 없었다. 가서 무슨 말을 딱히 해야 할 지도 모르겠어서 책만 샀다. 감탄하며 읽는 중이다. 어떤 관계는 마주치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잘 못 지낸단 이야기가 조금 엉성하고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