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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연산 Oct 18. 2022

괜찮은 날 덜 아픈 날도 가끔

우울과 함께해도 

연습실에 사진을 걸 큰 틀이 왔길래 집에 남는 집게를 가져다주기로 했다. 방과 베란다 잡동사니를 한참 뒤지고서야 나무집게가 나왔다. 집게가 나오기 전, 박스에서 2014년의 일기를 발견했다. 사실 일기만 한 박스인데 못 보고 지나칠 수가 없긴 했다. 해리 포터에 나오는 톰 리들의 일기장 아는가? 내게는 당시 약 2년간의 일기가 그렇다. 문장 하나하나가 우울에 찌들고 좀먹을대로 좀먹어서 보고 있으면 정신력이 깎인다.


펼쳐본 일기장에는 기대하지 말자, 기대를 하지도 받지도 말자. 밥을 다시 혼자 먹는 데에 익숙해지자. 따위의 말이 틈틈이 적혀 있었다. 빨간색으로 동그라미를 몇 번이나 치고 별표까지 쳐 놓은 걸 보니 8년 전의 나는 정말 남이 주는 상처를 받으면 하늘이 무너지는 사람이었구나, 싶었다.    

           

지금의 나는 잘 산다. 8년이 지났다. 그간 사람이 밝아지고 우울증을 극복했다 같은 싸구려 소설같은 얘기는 하지 않겠다. 일단 나한테 있어 그건 사기고.           

     

덜 어두워졌다. 그게 정확한 표현이다. 여전히 돈은 없다. 애인도 없고 인간관계도 쉽지 않다. 그래도 잘 산다. 주말 내내 알바를 하고, 연장근무를 시키는 사장도 욕해보고, 손님이 많은 상황도 욕해 보고, 집에 와서 투덜거리지만 그래도 내 손으로 내가 쓸 돈을 벌고, 병원을 정기적으로 간다. 약을 거르지 않고 챙겨 먹고, 종종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맛있는 음식을 사 먹는다. 얻어먹는 횟수가 아직은 더 많지만,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주, 더 오래 연습실에 가서 빙빙 돌고 구르고 뛴다. 춤을 추다 보면 매일매일 나는 왜 이렇게 형편없나 싶은데 날 기록한 영상을 보면 놀랍게도 조금씩 늘고 있다. 

             

오늘은 예술의 전당에 입사지원서를 냈다. 아. 그리고 이거 나중에 써야지, 나중에 써야지 하고 뒀다가 8달이 지나 버렸는데, 예술의 전당 하니까 생각났다. 2월 18일 나는 서울 예술의 전당 무대에 일반인 출연자로서 공연을 하러 올라갔었다. 진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좋다. 그 때 힘들었던 것들도 이젠 거의 괜찮다. 갯수든 깊이든. 라이온 킹 오리지날 캐스트도 오며가며 마주칠 수 있어서 신기했다. 그리고 언제 또 '예술의 전당' 메인 무대에 서 보겠나 싶기도 하고.  

               

지난주엔 서울에 다녀왔다. 예술의 전당에 나를 올라가게 해준 무용단의 야외공연을 보러 갔고, 운이 좋아 직접 즉석에서 가장 존경하는 안무가와 공연을 10여분간 할 수 있었다. 꿈만 같았다, 는 사실 이제야 하는 이야기고 그 날 공연 직후 마이크를 받고 내뱉은 후기는 아, 어지러워요. 였다. 그래도 좋다. 잘 곳이 없었는데 연습실 한 켠에 자리를 내 주어서 무려 사흘을 먹고자고 했다. 회식도 같이 갔고. 꿈인가 생시인가 했는데 연습실에 자려고 누우니 뒤지게 추워서 현실이 맞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좋았다. 나중에 서울에 오게 되면 연습실에 계속 연습을 와도 될까요? 라고 묻자 그러라고 했다. 감사했다. 졸다가 틀어둔 히터에 화상을 입었는데, 그것도 그냥 그것대로 상처를 볼 때마다 이 기분좋음이 기억날 것 같아서 그냥 뒀다.      

          

유명 가수의 백댄서로 일하던 춤 선생님을 만나 밥을 얻어먹었다. 결혼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린다 했다. 고기는 맛있었다.저녁엔 현대 무용 수업을 두 번 들었다. 화, 목 아침엔 무용단 사람들과 함께 한 시간동안 몸을 풀고 공연 준비를 구경했다. 딱히 돈이 많진 않지만 고마움을 표하고 싶어 연습실 냉장고에 맥주라도 몇 캔 사서 넣어뒀다. 생색내기는 뭐해서 그냥 조용히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좋아하고 존경하는 작가님도 뵈었다. 한 사람으로서 이야기를 하는 작가님이 좋았다. 밥도 정말 맛있었다. 화려하지 않고 소담한 맛이 나는 밥을 천천히 씹고 물 대신 나온 차를 천천히 마셨다. 책을 어떻게 하면 잘 쓰는지 여쭤보고 싶었는데, 그냥 얘기하고 듣는 게 좋아서 굳이 이야기를 길게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잘 했다고 생각한다. 작가 ㅇㅇㅇ보다 사람 ㅇㅇㅇ을 만난 기분이 다른 때보다 더 들었다. 기차를 기다리다 작가님의 책이 서점에 놓인 걸 보고 같이 웃었다. 기분 좋게 집에 돌아왔다.      

         

30살 인생에 유래 없이 가장 덜 삐걱대는 지금이다. 내도록 우울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가끔 웃는 날도 있고 그렇다. 드라마틱하게 좋은 일은 없긴 하다. 근로계약서도 없이 알바를 세 개 하고, 몸에 카레 냄새가 안 빠진다. 연습에 가면 몸이 따라 주질 않아 복장이 터지는 기분도 든다. 그래도 다 괜찮다. 사람에게 전보다는 덜 집착하게 되었다. 침대에서 우울을 삭히기보다 뭉그적대면서라도 피로를 풀게 되었다. 3여년만엔가 고등학교 동창이 친구와 함께 내가 알바를 하는 카레집에 놀러 왔다. 길게 얘기를 할 수 없어 근황을 한 줄로 요약해줬다. 춤을 추고 살고 있어. 나중에 친구에게 전해들으니 '여전하네' 라고 했다고. 꽤 괜찮은 평이다. 여전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행복해지는 길 같은 건 아직 모른다. 그래도 덜 우울하다. 아직 안고 가야 할 것, 내려놓지 못한 걱정이 보통의 사람보다 많은 걸 안다. 그래도 괜찮다. 나쁘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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