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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하셨어요. 그럴 리가. 제가요?

아, 예.

by 구연산

오디션에 붙었다.


닥치는 대로까지는 아니고, 그냥 되는 대로 여기저기 넣었다. 전공 경력 무관한 곳만 넣었다. 깡그리 떨어졌다. 그런데 마지막 게 1차가 붙었다고 연락이 왔다. 그럴 리가. 2차 면접 겸 오디션까진 6일인가의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연기를 해야 한단다. 나는 춤은 어찌저찌 춰도 연기를 할 자신은 없는데.


원래 연기는 잘 모른다. 연기를 전공하는 사람이 주위에 몇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다 춤추다 생긴 연이고 넉살 좋게 팁 주세요! 할 정도로 친하지도 않다. 다만 그 민망함을 깰 만큼 마음이 절박했다. H에게 연락했다. 원래는 10분 내외의 연기를 준비하라길래 내레이션을 넣은 6~7분의 무용극으로 어떻게든 때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바뀐 오디션 내용을 보니 자유대사, 그리고 특기로 각 3분을 채우게 되어 정신줄을 놓겠으니 도와 달라고.


H는 흔쾌히 방향을 잡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이젠 연습실을 구해야지. 알고 지내던 학원 원장에게 연락했다. 1월즈음에 새해인사를 톡으로 짤막히 올리고 언젠가 갑니다 언젠간 하면서 4월 중순이 되어 있는 걸 발견하고 머쓱하게 인사로 얘기를 텄더니 내가 필요한 날에 자리에 없다는 말이 돌아왔다. 근처 연습실을 찾아봤다. 걸어 갈 수 있는 거리에 하나. 가격은 드럽게 비쌌다. 그래도 발버둥이라도 쳐봐야 하지 않나? 라는 마음에 친구에게 돈을 빌려 예약을 했다.


이틀 정도 현실을 부정하며 게임을 하고 대본을 고치고 불안이 차오르면 다시 대본을 고치고 음악을 들으며 안무를 어찌할지 청사진을 그렸다. 올해 상반기에 지원했던 것들 중 마지막으로 붙었고, 이것도 사실 잘 될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근데 내가 이짓거릴 왜 하고 있냐, 물으면 나도 모른다 답했을 것이다. 체력도 집중력도 달려서 20분 뛰고 담배 피고, 눕고, 대본 외우고, 틀리고, 구르고, 멍들고 뛰고, 어색해하고. 그렇게 헛구역을 해가며 어찌어찌 뭔가를 급조해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시간 안에 체력이 떨어지니 편의점에 들러 음료를 샀다. 액상과당만큼 순간적으로 에너지 땡겨쓰는 데 좋은 게 없다는 믿음 하에. 집에 와보니 그거 제로음료였다. 그것도 모르고. 그렇게 우당탕탕 엉망진창으로 연습을 했다.


그리고 정신 차려보니 오디션 당일이었다. 버스를 타고 갔다. 오디션장에는 사람이 몇 없었다. 시간차로 이뤄지는 것도 이유겠지만 애초에 뽑는 인원수가 몇 안 되었기에. 대사를 위해 정장이나 로퍼 등을 입고 신은 사람들을 보며 찌글찌글 위축됐다. 나는 그냥 연습복 안에 카라티 하나만 입었는데. 맨발로 들어가야 하고..


나는 조금이라도 빛이 덜 닿는 구석에 누워 한숨만 깊게 들이쉬고 내쉬다 호명을 들었다.


들어가기 전에 안내해주는 분께서 내게 말했다. 자기소개를 하고, 대사, 특기를 하란다. 자기소개? 그런 거 없었는데...이제 와서? 여기에서? 뭘 말해야 해? 도대체 뭐라고 해야할지 몰라 황망한 마음으로 오디션장에 들어섰다. 아까 스태프가 이분들 길게 얘기하는 거 안좋아하니까 짧게! 음. 화이팅! 이라고 했다. 어지간하면 얼굴을 기억하는 편인데 안경 쓴 남성이라는 것만 기억나는 걸 보니 나도 참 긴장했었나 보다.


오디션은 엉망이었다. 자기소개부터 버벅였고,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 준비한 대사는 절반 정도밖에 못 했다. 특기를 하면서는 거의 울 뻔했다. 특기로 춘 춤이 끝나고 숨도 고르지 못해 뭘 물어보면 헉, 그게, 헉, 어쩌고. 이랬다. 나오자마자 짤로 내일 자살해야지. 라는 걸 검색했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캐릭터를 보며 난 뭘 위해 여기 왔나, 하며 담배를 뻑뻑 폈다.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는 시간을 지나 나오니 지인 한 명이 오디션을 기다리며 특기를 연습하고 있었다. 아. 이사람. 원래도 잘하는거 알았는데. 난 택도 없겠구나.


괜히 황망하고 해서 지인이 오디션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왔다. 붕 뜬 말을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잘 되셨으면 좋겠다. 저는.. 음.. 좀 잘 안 된 것 같다. 잘 하는 분도 워낙 많고. 애초에 친하진 않은 사람이라 곧바로 헤어졌다.


그대로 집으로 도망쳐 들어가고 싶었지만 Y를 보기로 했다. 다 썩어져가는 나를 적은 저번 글을 읽고 연락을 해준 고마운 사람이다. 덕분에 마음을 조금이나마 추스리고 걷고, 꽃을 봤다. 나는 나를 나름 시골 놈이라 자부했는데 갖다 댄 나무 이름이 다 틀려서 속으로 좀 웃었다. 거 콩이랑 고구마 이런건 구분할 줄 아는데 말이다.


여하간 다녀와서 앓았다. 죽은 듯 잤다. 앓고 자고 앓고 자고 굶고 자고. 그리고 결과발표 당일. 일부러 늦잠을 잤다. 오후에 일어나 몇 번이고 공지사항을 보는데 뭐가 안 올라오길래 아 어차피 안 될 거 왜 쳐다보나 싶으면서도 계속 보게 되더라. 오후 세 시인가 네시즈음에서야 겨우 마음을 다른 데 두려고 게임을 켜서 했다. 여섯시 한 20분 전인가, 폭탄을 어디다 둬야 저 악당을 한 번에 터뜨리고 들키지 않은 채 도망칠 수 있나(RPG 게임이다) 하는 고민이나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구연산 씨냐고. 맞다 했다. 오디션을 본 곳이었다. 묘하게 가라앉고 차분한 목소리라 아 여기는 불합격 해도 전화를 주는구나 싶었다. 공지사항을 봤냐고 했다. "아니요." '구연산씨 최종합격 하셔서요.'


'제가요?' 라고 했다. 그리고 속으로 그럴 리가. 라고 했고. 방에서 나와 한 세 바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다 끄악!!!하고 소릴 질렀다. 아. 뭔가 됐구나. 그리고 이틀 내내 다시 공지를 눌러봤다. 나일 리가 없을 거 같아서. 내 실제 이름의 성ㅇ은 흔하고, 뒷자리 번호가 **인것도 두 자리 정도는 다른 사람도 있으려니 하면서. 그렇게 몇 번이고, 하다못해 정정이 될 줄 알고 쳐다본 공지사항은 요지부동으로 내 정보를 보여주고 있었다. 정신 차리시라고 너 붙었다고. 그만 쳐다보라며.


그런 고로, 뭐 어찌어찌..처음으로 뭐 다운 예술인이 되었다.


사실 아직도 모르겠고 실감도 안 난다. 오디션 때 그렇게 절고 말로 두들겨 맞았는데 됐는지도 모르겠고, 착오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내가 됐다니까. 뭐.


부친께 처음으로 내가 예술 관련된 일을 하려 했고, 결실을 본 첫번째 일이라 했다. 그는 나름 기뻐했다.(그는 내가 3년 전에 예술의 전당이라는 큰 무대에 올랐던 사실도 알리지 않았다) .앞으로 뭘 할거냐 묻길래 눈 앞의 일이나 잘 쳐내겠다 대답했다. 방향이고 계획이고 예측과 예상을 다 빗겨가는 삶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할일을 그때그때 꾸역꾸역 쳐내는것밖에 없다면서. 그게 경험상 맞는 것 같다고. 진심인 게, 작년부터 계획한 일은 싸그리 틀어져 돈도 못 모았고, 해외 오디션은 커녕 몸이 쪼그라들고만 있었으니. 그때그때 들어오는 일이나 쳐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연습실비를 빌려준 Y가 축하할 일이라며 우리 동네에 와 맥주를 샀다. 그 날부터 이틀째 딸꾹질이 멎질 않는다.


그래서, 어쨌든. 예술가가 됐다. 어영부영 얼렁뚱땅 살다 드디어 내 스스로 내세워야만 하는 예술가가 아니게 되었다. 어딘가에 소속되고 인정받는 예술인이 된 건 처음이다. 물론 방금 두 줄만으로 책 두 권은 쓸 수 있을만큼 많은 이견과 의견이 있겠지만. 혼자 하는 건 예술이 아니냐, 부터 시작해 주절주절. 나도 양가감정이 들지만 받침대가 내 말과 주장밖에 없던 '예술인'직함에 타인이 인정해 줄 뭔가가 생긴 건 처음이라 얼떨떨하고 실감이 나지 않는다. 뭐 대단하게 어마어마한 일도 아니고, 돈이 막 쏟아져나오는 그런 것도 아니다. 그래도 내가 예술가랜다.


브런치에 글을 쓸 때 전에 직업은 학생이었다. 그리고 졸업하고 우울하다, 보험이 없다,돈이 없다, 뭐가 없다 없다 할 때 어느 에디터인지, 직업란을 예술가로 바꿔 두셨더라.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땐 직업을 수정하는 칸이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냥 내가 못 찾은 거일수도 있지만.


여하간, 감사하고 얼떨떨한데, 하는 만큼 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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