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많이 약해졌다. 여기서 더 나빠질 수 있나, 싶었는데,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쌀 20kg 한 포대를 드려다가 허리가 나갈 뻔했다. 몸에 힘이 안 들어가서 가스레인지 하나를 못 들고 휘청였다. 걸어가도 죽는다는데 뛰어간다는 말을 옛날에 보던 웹툰에서 본 적이 있다. 뛰어간다. 움직이지 않고 햇빛 안 보고 밥을 밤 열 시에 먹고 새벽 두 시에 먹는다. 무기력하고 의욕이 없다. 얼굴엔 개기름이 번들거려 눈을 찔러 따끔거리고, 모자를 써도 떡진 채 삐져나온 머리가 산발이다. 담배를 더 많이 빨리 핀다. 실제 달리기를 하라면 30미터도 버겁지만, 지금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거라면 나는 비행기를 탄 셈이다.
잠에서 깨는 시간은 좀 빨라졌다. 문제는 충분히 자지 못하고 깼다가, 다시 꾸역꾸역 자고는 12시에나 깬다. 그 때쯤 깨서 운동을 다녀온 모친께 인사를 하면 아들 오늘은 일찍 일어났네, 라고 한다. 챗지피티랑 가끔 대화를 한다. 오늘은 나갔냐고 묻는다. 스트레칭 30초라도 해보는 건 어떻냐고 묻는다. 오늘 보니 29000원이 결제되어 있다. 아. 맞다. 얘도 많은 관계가 그렇듯 돈을 내야 유지가 되는 거였지.
의사를 보기 무섭다. 마지막 방문 때, 본인 입으로 모질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 뭘 할 상태 자체가 아니라고 했다. 워크숍이고 해외 연수고, 돈을 떠나서 연습실에 갈 체력도 없는데 열 살 이상 어린 사람들이 매일같이 몇 시간씩 연습실에 나가 땀흘리는 걸 이길 수 있겠냐고. 지금 워크숍을 가든 오디션을 가든 결과는 본인이 가장 잘 알테고 그렇게 다녀와 홀쭉하다못해 뼈라 하기도 민망한, 생선가시만큼 얇아진 지갑을 보고 '그래도 나는 이거 도전했고 다녀왔으니까' 라고 자기위안 할 거냐고. 그래서 이제 의사를 보기가 무섭다. 가면 할 얘기가 너무 많았는데, 지금 당장 생각해보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약만 타서 나오고 싶을 뿐.
그러게. 최근엔 권을 만났다. 집에 있는데 뭐 하냐고 하길래 숨쉬지. 라고 했다. 보잔다. 알겠다 했다. 근데 내가 돈이 없다 했다. 권은 나를 데리러 와 본인 집 근처의 술집에 데려갔다. 대학 이후로 처음 가본 그 싸구려 술집은 나름 좋았다. 맥주 500을 마시고 소맥을 타 마셨다. 침묵이 길었다. 딱히 할 말도 들을 말도 없었다. 와중에 그는 내가 체력이 없고 걷는 걸 잘 못 하는걸 알아 집에서 10분은 되는 유흥가 술집 거리에 차를 대놓고 내일 아침에 오면 되지, 너 오래 못걷잖아. 라고 했다. 술을 마시고 나오는 길에 '음. 토하고 싶다.' 라고 얘기하고 10초도 되지 않아 토했다. 그게 니 말대로 되는 그런거였냐고 묻는 권에게 '나는 그렇지 뭐' 라고 대꾸했다. 허리도 꺾지 않고 그냥 읅, 하더니 뭘 뱉고 그대로 걸어나가는 내가 신기했던 모양이다.
며칠 전은 또다른 친구의 생일이었다. 받고 얻어먹은 게 많은데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지 그 전, 거의 10여년 전에 관둔 게임에서 출시한 오래된 랜덤 박스를 팔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있는 대로 다 팔았다. 현금화할수는 없지만 게임을 살 수는 있는 돈 34000원인가가 있었고, 훈은 어쩐지 다행히 타이밍 좋게 이런 게임이 나왔다던데 자기 취향이라 했다. 게임을 선물했다. 아이디를 다시 물어 선물했다는 사실이 혼자 부끄러웠다. 온라인 상태면 내가 항상 접속해 있는 걸 들킬 거라 그를 친구창에서 삭제했었기 때문에. 돈이 없어 이것밖에 못 해준다는 메세지를 보내자 그는 내가 이미 가지고 있고 '언제 한번 하자' 로 약속한 게임을 같이 100시간 해준다는 얘기만 했어도 만족했을거라고 했다. 고맙다고 했다.
뭐가 썩 잘 되고 있지는 않다. 토익 시험이라도 봐둘 걸 했는데 의욕도 돈도 뭣도 없어서 그냥 안 했다. 날 주기적으로 챙기고 연락하는 지인이 토익 850만 넘기랬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예전엔 대충 봐도 그정도 점수는 낼 수 있었는데, 활자를 읽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되었다. 게임하다 나오는 영어 텍스트도 대충 뉘앙스로 때려맞추고 있는지라 내 실력이 어디까지 떨어졌는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지원한 알바나 공고는 모조리 떨어졌고, 내일, 아니 오늘 나올 것도 안 될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거의 애걸복걸하며 자리 없냐고 구걸을 한 곳에선 그 어떤 답도 오지 않았고, 얄궃게도 '2차 지원을 해보십시오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따위의 문구가 적힌 단체 발송 메시지에 지원은 어찌어찌 했었다만.
산다는 건 고통이라고 했나. 이건 고통도 아니다. 부패지. 산 채로 곪고 썩어가는 거다. 신경 끝이 다 타버려서 감정적으로도 무감각해지고 누군가에게 애정이나 관심을 보이는 것도 받는 것도 어렵고 버겁다. 하다못해 우리집 개만 해도 버겁다. 4킬로밖에 안 되는 이 개가 안아달라고 가끔 보채면 안고 컴퓨터를 하면 말 그대로 팔이 저리다. 하품을 하고 꿍얼거리는 강아지를 내보내려 하면 나가지 않겠다고 엉덩이를 내려붙이는 그걸 맘 편히 보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내 우울 옆에서 같이 부패하지나 말라고 내보낸다.
리어 왕이었나. 영화 버드맨에서는 인용구가 대사로 나온다. 분노와 고함으로 가득한 말들 속, 그 어떤 의미도 없는 그런 거라고. 삶이랬나 세상이랬나. 그냥 백치가 뭘 말하는지도 모른 채 내지르는 무의미한 고함.
나는 입이 없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기분을 가끔 느낀다. 나는 권처럼 의무적으로라도 사람을 잘 챙기는 걸 잘 하는 편이 아니고, 친구 E처럼 행동력이 좋지도 않다. 훈처럼 포용력이 넓지도 않다. 요새 한동안 롤 모델로 삼는 철의 경우는, 위에 언급한 권과의 술자리 이후 알았다. 걔는 술을 마시든 안 마시든 말이 없다. 자기 표현을 하지 않고 무뚝뚝하다. 그러면서 크게 우울해하지도 않고, 가끔 실없는 것에 즐거워한다. 무표정하고 뚱하고 가끔 사나워보이기까지 하는 인상의 철은 감정기복이 거의 없이 평탄하다. 원래 기질에 10여년에 걸친 직장생활이 그를 그렇게 깎고 남은 게 그거겠지만. 여하튼, 나는 술을 마시면 쓸데없는 소리를 많이 하고 내가 놓친 것들 잡지 못한 것들에 대한 미련과 집착으로 지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 산다. 그래 죽어 간다.
최승자 시인은 어느 인터뷰에서 그랬다. 문학은 슬픔의 축적이었다고. 그 역시도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기쁘면..모르겠다. 그렇다. 이래 지낸다. 나는 별 일 없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