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연기며 발레 이것저것 다 해보고,

끈기 없는 애,라고 가득 불리던 난 커서 당차고 신념 있는 작가가 됐다.

by 이승현

어린 시절 나는, 엄마에 의해 발레 학원을 나갔는데 다리 찢어진다고 울면서 포기했다.



포기란 내게 늘, 쉽고 빠르며 뚝딱뚝딱 정의될 수 있는 게 결코 아니었다.

나에게, 포기는, 타인의 눈엔 굉장히 쉽고

단순해 보일지라도 여전히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해볼 만큼 다 해보고 내가 정말 죽겠다 싶을 때, 그제야 말로 겨우 겨우 탈진해 두 손 두 발 다 들고 포기하는 것.



아무것도 모르면서 엄마는 나를 이것저것 진로를 탐구한단 핑계로 왜 이렇게 못 살게 굴까.

어린 맘에 울며 힘들다고 내내 말한 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 내 나이는 많아야 6세~7세가 아니었을까.



뭐든 어릴 때 시작해야 한다고. 진로를 찾아줘야 한다고 그래서 엄마 아빤 그렇게 그토록 노력하셨겠지만 나는 늘, 불평이 많았고 포기했다.

다리 찢어지겠다고. 못 하겠다고 엉엉 울면서 말이다.



그 당시 발레는 정말 비쌌고, 하는 친구들이 별로 없을 정도로 희귀했다.



나는 그저 놀고 싶었고 나는 친구들과 한데 어우러져 놀고만 싶었다.

내 기억엔 없지만, 발레에 이어 연기 학원도 갔었다고 들었다. (에헴)



연기를 잘하지도 재능이 있지도 의지도 없었기에 그쪽으로 빠질 일은 전혀 없었어서 정말 다행이지만, 엄마의 내 진로 찾기는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나로서는 매일매일 엉엉 울 만큼

난 참 버겁고 벅찼다.



키도 작고, 얼굴도 뽀얘서 울면 눈썹이 마구 붉어지는 (빨개지는) 아이였다. 나는,

엄마는 그런 내게, 어릴 적에 진로를 찾고

어릴 적부터 뭐든 꾸준히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10대도 아닌 겨우 6세~7세이던 나는 그런 의미를 모두 다 해석하고 이해하진 못 했다.



사실 나도 고집이 있어서 딱히, 별로?

굳이? 그런 것들을 모두 이해하고 싶진 않았다.



내 주관이 이미 자라 버린 나이에

이런 것들을 못 배우는 사람도 있으니 늘 감사해야 한단 마음보단, 엄마는 대체 나를 왜 이렇게

못 살게 굴지?

나는 정말 숨 막히고 죽을 것 같은데..라는

마음뿐이었다.



연기, 발레.. 에 이어 미술학원 웅변학원

그 당시 국 룰처럼 이어지는 평범한 학원 코스였다.



나는 어릴 적엔 꽤나 내성적인 아이였고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의사표현을 잘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엄마는 내가 확실하게 내 의사표현을 하고

조금 더 활발한 아이로 자라길 간절히 바라셨다.



그래서 웅변학원에 다녔고 솔직히 딱히 재미는 없었다. 다닌 지 얼마나 지났을까.

성인이 된 나는 그런 것까지 일일이 디테일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그 당시, 엄마의 바람대로 내가 당당하고 활발한,

말을 다 하는 아이가 아닌

그저, 웅변학원에 다니고 나는 아주 큰 트라우마가 생긴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물론, 지금은 그 기억이 무쓸모는 아니지만,

내 삶에 다 뼈가 되고 살이 되어줬지만.

하나의 자산이기도 하고,



지금은 크게 별 상관은 없지만,

그때는 무서워 많이 벌벌 떨었더란다.

아주 많이, 내가,


어느 날, 갑작스럽게도 웅변대회에 나가게 됐다. 나는 당연히 난 잘 못 하니까 얼마 안 됐으니까.

그 웅변대회 후보에 내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방청객처럼 친구들을 열렬히 아주 편한 맘으로 응원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무대에서 내가 웅변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할머니께서 만들어주신 핑크색 드레스,

올림머리, 화장. 그리고 하얀 피부에 금 귀걸이와 팔찌를 하고 있었던 나, 어릴 적부터 주얼리를 정말 좋아했었나 보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게 나는 하얀 피부에

(지금은 썩 많이 탔지만...) 울기만 하면 눈썹이 빨개졌다. 누가 봐도 우는 아이. 그 자체였다.



나는 나가고 싶지 않았는데.. 그 웅변대회,

어른들이 원하고. 학원 선생님들과 원장님이 원해서 나간 그 대회.



결론적으로 나는 은상을 받았지만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처음 보는 수 십 명의 사람들이 내 앞에

서 있었고 매서운 눈으로 나를 마주했다.



웅변을 포기하고 싶었다. 웅변대회에 나오게 한 부모님과 선생님들,

그리고 끝내는 싫어요. 아 짜증 나! 정말 싫어.라고 아이답게 말하지 못 한 나를 원망했다.



어른은 아닌데, 자꾸 어른인 척하는 내게 단단히 화가 났다.

무사히 웅변대회를 마쳐야 하는데 처음 보는 광경과 사람들에 의해 겁먹고 내내, 몹시 무서웠다.

나는 정말 오줌을 지릴 것 같을 정도로 두렵고 무서워졌고.



내내, 울먹일 것 같았는데 빨개진 눈썹과 동그란 눈에서 눈물이 뚝-

하고 떨어지기 전에, 그저 눈물이 촉촉하게 자리 잡아 내 눈가에서 눈물이 덩그러니 앉아만 있을 때.



그때 나는, 너무나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너무나 무서워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

피하고 싶었고 하지만 난 결국 회피하지 않았다.



이유가 자의가 아니었을지라도 그 무서운 경험은 성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고,

여전히 큰 자산이 됐다.



정말 무서워서, 빨개진 눈썹과 빨개진 딸기코와 빨개진 눈, 툭하고 치면 엉엉, 꺼이꺼이 울 거 같은 얼굴을 하곤 아무것도. 머릿속이 새하얘져,

생각이 안 나자 나는, 그냥 했다. 그냥 해야만 했으니까. 그 자리에서.



그래야 화장실도 가고, 눈물도 닦고 머리도 보고,

눈물이 나는지, 난다면 무슨 이유인지 침착하게 분석하고 나를 달랠 수 있었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툭 건드리면 울 거 같은 물러 터진 감귤이 되어서는

~외칩니다. 를 정말 외쳐버리곤 무대를 유유히 아주 도도하게, 내려올 수 있었다.



회피하지 않고 무대에서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무서워도 눈물 꼭 참고 삭인 어린아이는

무대에서 내려와서 그제야 울었다.

(물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존심은 엄청 쎄 가지고, 부모님이든, 타인이든 그게 누구든. 아무리 친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울기 싫었다. 그런 모습. 죽어도 보이기 싫다.



그래서 화장실에 가서 눈물을 쓱 닦고 아무 일도 없는 척했다.

가족들에겐 무서웠다, 고 솔직하게 고백했고.

가족들은 잘했다고 안아줬지만 나는 꽃도, 은상의 트로피도 사실 그다지 별 의미가 없었다.



그냥 내가 시작한 걸 마무리 지어야만 끝낼 수가 있고 그 무대에서 또 내려올 수 있었다.

무서운 건 한 순간이고, 뭐라도 해야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걸 어릴 적 체감했고 몸소 깨달았다.



그러고 나서, 상을 받고 무서운 기억에,

더는 웅변대회는 나가지 않았다. 웅변 학원 또한 나가지 않았다. 나는 그저, 또, 포기했다.



미술학원은 나름 제법 재밌었는데,

뭘 해도 그렇게 엄청 하고 싶지도 않고

의지가 있지도 않고 전문가처럼 잘하지도 않았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나는 그냥 곧잘 따라 하고 또 하면 하지 뭐, 하며 하는 편이었지만, 엄마의 진로 찾기처럼 전문가처럼, 계속 곧잘 할 수 있는 업이 나에게는 정말 쉽지 않았다.



미술도, 웅변도 그 뭣도 다 싫었다. 어린 마음에.

그냥 좋아서 하는 게 아닌 해야 해서 하는 것.

질리고 진짜 진절머리 날대로 났다.



그냥 하다 보면 즐기게만 된다면 그것도 참 복인데..

참 아찔하게도 즐기고 재밌어지는 게 내겐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타인이 보기에 내가 포기를 밥 먹듯이 하다 보니까, 나는 아무것도 못 하는 애. 늘 포기하는 애, 끈기 없는 애가 되어 있었다.

서운했다, 서글펐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뭘 잘하고 뭘 좋아하고 재밌어하는 지를 타인에게 증명할 필욘 없다고 생각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미술을 좋아했지만, 업으로 삼을 만큼

좋아하지도 않았고 업이 될 만큼 사랑하지도 않았다. 업이 될 만큼 전문성 또한, 떨어졌고.



그렇게 계속 내내, 포기하다 보니까 가족들은 나보고 어릴 적에 찾아놔야 하는데,

너는 정말 끈기가 없다. 라며 나무랐다.



아니, 내가 정말 죽겠는데 뭘 하나 싶어서

쪼끄만 어린애가 엄마에게 하나도 지지 않고 또박또박 울며 말했던 것 같다.



어디 가서 꿀리고, 지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내가 또, 그게 내 부모님이랄지라도.



아닌 건 아니다. 웃으며 생글생글할 말 다하는 나. 그게 바로 나니까.

엄마 아빠가 찾아준 어린 시절 진로 찾기는

참 형편없고, 별 볼 일 없고 벅차고, 숨 막히기만 할 줄 알았는데..



청소년기를 넘어, 내가 성인이 되고

아주 크게 뼈가 되고 나름대로 살이 되어줬다.

모든 사람이 다 배우고 싶다배우고

하고 싶다고 하고 갖고 싶다고 다 갖고

그러질 못 한다는 걸 나는 청소년기쯤 되어서

안 것이다.



집이 가난한 적이 어릴 적엔 없었고

청소년기에 처음 삐걱거려서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으로 밥을 못 먹는 아이도 있고,

나처럼 갖고 싶다고 다 갖고 하고 싶다고 다 하고 배우고 싶다고 다 배우고



나아가 A, B 중 물건을 갖고 싶다고 다 갖는 건

흔한 일이라고 여겼는데 그렇게 극히 흔한 일도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은 양가적인 것 중 어쩔 수 없이 하나만 택하거나, 다 갖지 못하거나.

그래서 너무너무 지금 내 부모님께 많이 감사하다!



뜻밖의 유년시절에 유복하고 사랑받고 해 볼 것

다 해보고 살아서 포기할 수도 있었고

거기서 느끼는 바가 꽤 컸던 거 같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린 시절부터 정말 애늙은이였다. 그게 유년시절부 터였는진 나도 정말, 몰랐지만,



어쨌든 간에 작가가 되기까지 엄청난 노력과, 눈물이, 땀이 있었지만 거기서 가장 으뜸으로 어려웠던 건, 내 부모 설득하기였다.



엄마는 내가 사무직이나, 공무원이 되길 바랐고. 엄마 친구 딸이나, 아빠 친구 아들처럼.

나는 그렇게 제법 (?) 평온한 일자리를 하나 갖기에는 어려운 성향과 성격을 타고났다는 걸.

나는 그렇게 중학교 1학년 시절, 남들보다 아주 빨리 깨달았다.



내가 작가가 된 계기는 나중에 인터뷰에서 말하겠지만,

작가가 되기까지 정말 노력했는데.

엄마 아빠는 여전히 공무원 혹은 사무직이 되길 바라셨어서.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몇 년간 지독히도 설득했던 것 같다.



혼나기도 하고 욕을 먹기도 하면서 말이다.

엄마 아빠가 안 된다는 이유엔 그 이유가 정말 분명했고, 내가 된다고 하는 이유엔 역시나 그 이유가 정말 분명했다.



나는 내가 어릴 적부터 안 된다.라고 여긴 적도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없다.

그래서 정확히 23살, 이라는 어린 나이에 엄마를 완전히 설득했다.



몇 년 동안 설득한 끝에 드디어 설득을 성공한 것이다. 평소, 설득을 제법 잘하는 편인데,

내 부모라서 그런지 더 더욱이 어려웠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만약 비혼 주의인

내가 누군가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는다면, 자식이 작가, 라는 직업을 가지고 싶어요. 엄마,라고 말한다면?



내게 되물으니 나도 도저히 그래 해라,라고 바로 허락할 순 없겠더라.

부모의 심정을 1도 헤아리지 못하는 못나고

부족한 자식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무슨 의미인지 잘 알겠다.



재벌이거나, 투잡을 하거나.

작가는 자고로 그래야 한다고.

현 작가가 된 나는, 저 말을 뼈저리게 정말 실감한다.



그렇지만, 참 안타깝게도 나랑 같이 글을 썼던 또래들 중 준재벌이건, 투잡이건 간에.

현재는 함께 글을 쓰는 사람이 또래 중엔 단 한 명도 없다고.



그 사실이 나를 참 많이도 울렸다. 숱한 밤을 아마 날, 참 많이 아프게 하고 내내 울렸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시절, 아무것도 없고 마음과 굳은 의지와 겨우, 재능뿐인 나를,

지원해주고, 지지해주고, 혼내주고 응원해주고 옆에 함께 해준, 가족들에게 특히, 부모님께,

너무너무 많이 감사하다.



그 시절 내가, 엄마를 설득한 편지에는 20장이 넘었고 엄마가 노화가 와 보일까 봐

글씨가 작은 나는 더 크게 썼고.

거기에 ppt를 하듯이 엄마 아빠 앞에서 당당하게 아주 당찼던 나는, 그런 시기를 견뎌 작가가 됐다.



엄마 아빠 앞에서 내 미래를 말하고,

어떻게 살고 나는 어떤 신념이 있고

어떻게 이겨나갈 것인지.

어떤 장르가 가장 장점인지 등등의..

정말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어려운 부분을,

내내, 떨면서도 표면상으로는 하나도 떨지 않은 척,

아주 당당했던, 그날의 23세 승현이가,

나는 여전히 좋고. 정말 멋있다. 물론, 지금도! 지금의 승현이도 멋지고 늘, 어여쁘다! :)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하루하루가 감사하고

하루하루가 리즈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점에는 정말 정신이 없겠지만, 꼭. 반드시, 이뤄내서

차기작 할 때까지 살짝 짬이 있다면 인터뷰를 꼭 하고 싶다.



그리고 드라마의 꽃은 연출이기도 하고 극본이기도 하고 ost이기도 하고 음향이기도 하고

스태프분들과 많은 배우분들 등등 여러 가지

많은 부분들이 있겠지만, 나는 이제부터

더, 열심히 즐기며, 더, 그렇게- 살란다.

ost 부탁할 수 있을 만큼 멋진, 나.

그리고 멋진 실력 쌓아야지! 아자아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