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리뷰할 영화는 <시계태엽 오렌지>다. 1971년 작품이지만 아직까지도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분명히 존재한다.
배경
<시계태엽 오렌지>는 차갑고 어두운 디스토피안 사회를 그려낸다. 요즘 영화보다는 적나라하게 범죄가 묘사되어 보기가 조금 거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현대사회의 단면들을 엿볼 수 있다. 그만큼 아직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불완전한 지를 보여준다.
특이한 시점
보통 영화들은 경찰 시점이 대다수다. <조디악>, <서치>, <암수살인>, <21브릿지> 등 수사 과정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반전을 꾀하는 영화들이 주류다. 반면에 <시계태엽 오렌지>는 주인공인 '알렉스'가 처음부터 이야기를 서술해 나간다. 알렉스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내기 때문에 범죄 행위의 잔혹함을 몸소 경험할 수 있다. 동시에, 범죄자 시점을 통해, 알렉스 본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심리 변화에 관심을 가지게 해 준다.
범죄자를 향한 시선
영화의 앞부분들만 보면 알렉스와 그의 무리에 증오감을 갖게 된다. '어찌 살인과 강간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사회에 던져진 알렉스가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장면들은 연민과 동정을 유발한다. 알렉스 입장에서 영화를 그려내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감정을 절대로 이끌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알렉스를 보며 느끼는 연민과 동정은 전과자를 향한 시선에 대해 고민을 하게 한다. 살인, 강간 등의 강력범죄는 절대로 용서될 수 없으며, 가해자는 당연히 죄책감을 갖고 평생 동안 반성하며 살아야 한다. 대다수의 경우, 전과자는 알렉스처럼 사회에서 낙인찍혀 적응하지 못한다. 그러나, 징역살이와 재사회화 과정을 성실히 마치고 긍정적으로 탈바꿈한 전과자만큼에게는 차가운 시선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론적일 수는 있지만, 적응하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비로소 재발의 가능성이 줄어들고, 조금은 더 안전한 사회가 될 것이다.
특이한 주인공과 노래 설정
'알렉스'라는 인물 설정도 특이하다. 못 살고 못 배운 범죄자들과 달리 알렉스는 지식인층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언어 사용뿐 아니라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다는 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지능 높은 사이코패스 정도가 적당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알렉스와 친구들이 범법행위를 저지를 때 상황에 맞지 않는 흥겨운 노래가 나온다. 청소년이었던 알렉스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일을 얼마나 가볍게 여겼는 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막상 3인칭 시점으로 그런 행위들을 보며 알렉스는 거북스러움을 경험하고 폭력을 향한 증오를 느끼게 된다.
과학 기술 v.s. 개인윤리
알렉스를 대상으로 시행된 실험은 정당화가 될 수 있을까? 인체 실험을 통해 알렉스는 악에 대한 거부감을 얻게 된다. 자의, 즉 자신의 도덕적 결정이 아니라, 폭력을 하려 했을 때 동반되는 육체적 고통이 알렉스로 하여금 선을 실천하게 한다. 심지어 알렉스는 자기 방어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은 욕구와 욕망을 이성을 통해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육체적 고통으로 인한 강제적인 결정을 하는 삶은 결코 인간의 삶이 아니다. 영화에서도 보여주듯이 주체성과 결정권을 잃은 알렉스는 결국 자살을 시도한다.
고로, 강제적 억압을 위한 인체 실험은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성을 잃게 하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없다. 교정행정의 본 목적인 교화와 재사회화의 취지에도 어긋난다고 본다.
개인이 희생되는 정치
이 영화에서 알렉스는 정치의 희생양이기도 하다. 여당에서는 재범을 줄이는 실험체로 사용되었고, 야당에서는 여당의 인권 유린을 주장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되었다. 야당 인물들은 심지어 알렉스를 자살을 시도하게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여당은 알렉스를 위하는 척하며, 알렉스가 반강제적으로 희생당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생충>, <조커>만큼의 찝찝함을 경험할 수 있는 영화다. 분명 오래된 영화이기는 하지만, 그 유통기한은 아직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