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주의자에서 몽상가로

by MIN

정말이지 지독하게 냉소적인 현실주의자였다. 머릿속에서 조금이라도 불가능하다 싶으면, 안 돼, 그게 말이 되니, 라는 식의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지금은 냉소적 현실주의에서 빠져나왔다. 생각의 줄기 하나가 나의 시선과 태도를 바꾸어 놓았다.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과 생각이 담긴, 이 생각의 줄기를 글로 항상 써보려 했다. 지금에서야 꺼내보려 한다.

때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반에 조용한 친구 한 명이 있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나는 그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 "넌 꿈이 뭐야?" "영생." "어?" 속으로는, 특이하네 무슨 저런 애가 다 있을까, 생각했었다. 이상했던 만큼 계속해서 떠올랐다. 막연한 호기심에 유튜브에 영생을 찾아보았다. 생각보다 과학적으로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에 일단 놀랐다. 그리고 깊은 고민에 잠겼다. 영생이라. 늙지 않고 계속 살 수 있다면. 이런저런 생각과 상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결론은, 안 늙으면 좋겠다,였다. 과연 내가 나의 모습으로 늙지 않고 살아가도 좋을까. 계속해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고 답하는 과정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습관들, 능력들, 장점들, 단점들, 결함들 모두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나를 아끼고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모습 이대로, 늙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것들을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를 사랑하는 만큼, 이 세상에서 무로 돌아가기가 싫었다. 또 지구과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조금 싸이코 같을 수는 있지만, 인류의 마지막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인류 역사의 마지막 장이 되어보자, 이런 생각이랄까. 사실 의과대학에 진학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화를 어느 수준까지 늦출 수 있을까, 직접 연구해서 알아내고 싶다.


더 이상 냉소적인 현실주의자일 수가 없었다. 불로장생을 하고 싶은 현실주의자? 모순도 이런 모순이 있겠는가. 몽상가에 가까워지며,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우선 다른 사람들의 꿈이나 이상에 편견이 없어졌다. 예를 들어,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의 화성 이주 프로젝트를 더 이상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원대한 목표더라도, 인정하고 응원하게 된다.


나 스스로가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뻔히 보인다. 그래서 보통 이 소재를 화두로 던지면, 말도 안 되는 허황된 이야깃거리로 치부된다. 그들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나 자신이 한때는 그랬기에. 그리고, '늙지 않고 계속 살 수 있으면 좋을까?'에 대한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살 만큼 살다가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죽어야지 삶이 의미 있지 않을까, 라는 뉘앙스의 답변만 돌아왔다.


어제는 달랐다. 새로 사귄 친구와 톡을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같은 질문을 했고, 돌아온 대답은 "나는 계속 살고 싶지"였다. 의외여서 그 이유를 물었다. "나는 내가 좋아서 계속 살고 싶거든. 누나는 왜 그래?"라는 말을 전송하려고 했는데 왠지 모르게 재수 없는 말 같았다. 대신 "누나 자존감 높지?"라고 고쳐 보냈다. "잘 모르겠어. 근데 나는 나를 엄청 사랑하긴 해."라고 답이 왔다. 거울과 대화하는 느낌을 받아서 신기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성공한 인생이 어디 있나 싶다. 내 모습 그대로가 좋아서 계속해서 살고 싶다고 느끼는 것만큼의 성공이 있을까.


아직 진로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건, 나는 이 생각의 흐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현실주의자에서 몽상가로. 더 포용력 있는 사고가 가능해진 것 같아서,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현실주의자를 비판하려는 의도는 하나도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몽상가 그리고 현실주의자, 모두 필요하다. 모던 패밀리 시즌 3 에피소드 9에 나오는 캐머런의 대사로 글을 끝내보려 한다.

"You see, the dreamers need the realists to keep them from soaring too close to the sun. And, the realists? Well, without the dreamers, they might not ever get off the ground." (몽상가는 현실주의자가 없으면 태양까지 날아가겠죠. 현실주의자는 어떨까요? 몽상가 없이는 땅에서 발도 못 뗄걸요.)


20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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