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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연 Jul 13. 2020

연습실


 "연기는 재미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한 번 더 생각해보겠어요?"

 휴학 후 연기를 배우기로 마음먹고 무작정 찾아갔던 연기학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었다.


 고민했다. 복학 전까지 연기 수업에 마음을 다할 수 있을지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일주일 후, 선생님을 찾아뵙고 말씀드렸다.


 "저 한번 해보고 싶어요, 연기."


 입시반 등록 후 수험생들과 함께 수업받았다. 첫날부터 '로미오와 줄리엣' 속 대사를 읽으며 줄리엣을 연기하리라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두 시간 동안 연습복이 흠뻑 젖도록 몸을 쓰는 훈련이 반복됐다. 말투와 호흡, 걸음걸이 등 평소 습관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수도 없이 받았다. 연기학원에 발 들인 것을 후회했다. 선생님이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학원 문을 박차고 나가는 대신 연습실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연습실은 배우의 실수가 허락된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선 수백 번 넘어져도 괜찮았다. 하지만 나는 연습실에서조차 마음껏 실패하지 못했다. 잘하고 싶었고 예뻐 보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앞설수록 진짜 내 모습을 숨겼다.


"너는 연기할 때 왜 예쁜 척을 하니? 지금 네 연기가 예쁘다고 생각하니?"

선생님의 피드백에 마음이 무너졌다.


 "선생님, 저도 예쁜 역할을 맡고 싶어요. 왜 저는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건가요?"

 "네가 생각하는 예쁜 역할이 무엇이니? 무대에서 예쁘게 꾸민 모습? 아니면 주인공?"

 "둘 다요."

 "배우가 가장 예쁜 순간이 언제인 줄 아니? 바로 무대에서 본인이 맡은 역할을 잘 해내는 것이란다. 옷을 차려입고, 단장하고, 예쁜 척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연기하는 것. 그런 배우를 보고 있으면 반짝반짝 빛이 나."


 단지 선생님의 혼쭐에 마음이 위축됐던 것이 아니다. 나는 인정하지 못했다. 들여다보기 두려웠던 나의 부족함과 모난 부분이 아팠다. 실패해야 나아갈 수 있는 공간에서조차 나로 설 수 없었던 이유였다.


 열등감으로 얼룩졌던 나 자신에게 용기 내기로 했다. 무대에 제대로 서보기로 한 것이다. 첫 연극에서 맡았던 역할은 '엄마'. 평생 딸로 살았던 삶에서 잠시 벗어나 무대에서 온전히 엄마로 보일 수 있도록 몰입했다. 몇 개월간 연습실에서 세 딸의 엄마로 살아가는 내내 고민했고, 넘어졌다. 일주일간의 공연을 무사히 마쳤고 그때야 선생님이 말한 '예쁜 배우', '예쁜 사람'의 의미가 마음에 닿았다.


 복학을 미루기로 했다. 연극영화과 입시에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나 자신에게도, 연기라는 영역에도 충분히 용기 냈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시험 당일, 실수했다. 무대 위에서 갈 곳 잃은 채 방황했다. 날 향해 내리쬐던 환한 조명이 잠시라도 깜깜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휘청거리는 몸과 부들거리는 마음을 겨우 붙잡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잘못된 도전이었다는 못난 생각이 밀려왔다.


 그 후 복학했고, 더는 연기를 배우지 않았다. 연기하는 일이 싫어지거나 무대에 서는 일이 자신 없어서가 아니었다. 연기를 배우고 무대에 올랐던 경험은 하루는 위로로 스며들었고, 하루는 용기가 되어주었다. 그저 삶의 또 다른 길이 궁금해졌다. 낯선 길에 들어서는 것이 처음 연기를 배웠을 때만큼 두려웠지만 또 한 번 넘어질 각오를 하며 한 발짝 내디뎠다.


 연기를 그만둔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실패가 있었다.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여전히 실수가 두렵고 실패가 아프다. 하지만 그때보다 나아진 점이 있다면 '실패'를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 앞으로 어떤 실패를 마주하게 될지 모르지만, 무대 위에서 방황했던 그때의 나는 아마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실패해도 괜찮다. 그 순간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것이고, 지금의 시간을 존재하게 한 것이라 믿는다. 연습실에서 실패한 순간들은 결국, 나를 좋은 무대로 이끌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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