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전혀 모른다.
부고가 들려온다. 어떤 이는 사고로, 어떤 이는 질병으로, 어떤 이는 스스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중에서도 한 사람의 소식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는다. 왜 그랬을지 추측하고 납득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죽음이라 어안이 벙벙한 채 그와 관련된 소식을 찾아본다. 솔직히 궁금했다.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최근에 결정적 사건이나 증상이랄 게 있었나, 혹은 조짐이 있었나? 주변과의 불화가 있나? 하고 누군가의 예측이 걸릴만한 검색어를 고르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검색 결과는 온통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하고 안타까워하고 미안해하는 글들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를 애도하기 이전에 내 궁금함을 채우고 추측하려고 했다. 조금 부끄러웠다.
일면식은 없지만, 애정을 느끼던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팬’이라는 이름으로 좋아하던 누군가의 죽음을 생각해 본다. 놀라움과 충격으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고, 몰라줬다며 미안해하는 사람이 있고, 그의 재능과 젊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있고, 그저 편안하길 바라는 사람도 있다. 사랑과 상실을 동시에 경험하는 사람들.
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자동적으로 왜?라는 물음부터 떠오른다. 왜? 어쩌다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죽음’이라는 것이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죽음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너무나도 특수한 일이니까.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친구에게 가족들을 남기고 목숨을 끊은 이에 관해 이야기했다. 친구는 크게 화를 냈다. 나도 처음엔 화가 났지만, 그 이유는 우리는 전혀 모르기 때문에, 알 수 없기 때문에 판단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친구는 그런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자신은 계속 화를 낼 거라고 했다. 이해가 됐다. 화가 나던 우리는 누구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고 분노가 생겼을까? 친구는 아마 남겨진 아이들을 생각한 것 같다.
이제 나는 등장인물들의 입장에서 벗어나 제3자로서 사안을 바라봐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옳다 그르다를 따지지 않고, 그런 선택을 일단은 이해하고, 남겨진 것들을 살펴보고, 남겨진 이들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게 도와야 한다. 남겨진 자들에게 잠은 잘 자는지, 생활은 잘하는지, 건강은 괜찮은지 물어봐야 한다. 나에게도 그게 필요했고, 앞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다.
다시 돌아가서, 이유를 찾으려던 이유는 그 죽음을 어떻게든 납득해 보려는 시도이다. 그가 세상에 없어도 되는 근거를 얻고자 함이다. 그래서 그랬구나, 이런 일들이 있었구나, 내가 몰랐던 사실이 있었구나, 같은 것을 발견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조건들이 있다면, 그 죽음은 일어나도 괜찮은 것일까? 일어나지 않아도 됐을 죽음이라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지만,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다 수년이 지나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있길 바라는 연예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아직 그들의 죽음을 붙잡고 있었구나. 나 역시 남겨진 자였구나.
‘나는 죽음의 길로, 당신들은 삶의 길로.’ 많은 이들이 죽음의 길로 떠났다. 우리는 삶의 길에 남았다. 나는 죽음을 특수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게 할 것인지 배우고 익히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 누군가를 위함과 동시에 나를 위한 것임을, 나 역이 남겨진 자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23. 4. 20